“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상호내주相好內住가 우리 신앙인에게는 최고의 상태이고 경지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주님 말씀하시듯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도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우리가 이뤄야 할 최고의 상태이고 경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느님 안에 있는데 하느님은 제 안에 아니 계신 경우가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받아들이시기에 나는 언제나 또 늘 하느님 안에 있지만
나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내 안에 안 계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 성체를 모실 때나 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 욕심이나 욕망이나 주장이나 이런 것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것을 비워낼 때 주님을 안에 모시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헌데 오늘 주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죄짓지 않는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는
내 안에 주님을 모시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 안에서 머무는 것도
잘 하고 있는지 반성케 되는데 주님 안에 있으면서 죄짓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내치지 않으시기에 몸은 하느님 안에 머물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는 입으로는 염불을 외지만 마음은 잿밥에 있는 것이나
주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지만 마음은 세상걱정으로 가득한 것과 같지요.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우리는 우좌지간에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고 그러기에 하느님 안에서
사랑도 하지만 다윗이 시편에서 얘기하듯 하느님 앞에서 죄도 짓습니다.
저의 경우 성당에 있을 때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수도 없고, 심지어는
성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어 깜짝 놀라 다시 하느님께로 눈을 돌리지만
그래도 저는 방에서 하느님 몰래 성적인 생각을 하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성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낫고 이것도 기도라고 강변을 하곤 합니다.
이렇게 강변을 하는 것은 기도란 감사와 찬미와 흠숭과 같이
꼭 거룩한 기도만 기도가 아니고
하느님께 그 미운 놈을 고자질 하고 그 놈 죽여 달라고 하는 것도
마음속으로 혼자 미워하고 욕하고 저주 퍼붓는 것보다는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너무 제 멋대로의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누구를 죽이고 싶은데 그 죽이려는 모의를 혼자 하지 않고
이렇게 죽이려고 한다고 성당에서 주님과 함께 모의를 한다면
아무리 사랑을 할지라도 하느님은 완전히 배제하고
지들끼리 밀어를 나누는 것보다 그것이 더 기도가 아닐까요?
그러나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문제없는 것이 아닌 것은 아니지요.
많이 쳐줘서 겸손의 기도라고는 할 수 있어도 아직 사랑의 기도는 아니고,
그래서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본 자의 기도가 아니라
아직 내 좋을 대로, 내 입맛대로 살겠다는 자의 기도이며,
그래서 아직 은총의 기도가 아니고 죄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너무도 사랑하여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이라면 어찌 몸은 하느님께 마음은 딴 곳에 있겠습니까?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한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이고,
평화도 몸과 마음의 평화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 존재적으로 어디든 도달한 경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얘기하듯
성령께서 내려와 그에게 머무는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면
물의 세례로 겨우 몸만 씻는 그런 상태에 머물지 않고
몸과 마음 모두 하느님 안에 온전히 머무는 경지에 이를 것이기에
죄를 씻는 물의 세례가 아니라 나를 태우는 불의 세례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성령의 불로 저를 태워 주소서~!
매일의 기도로 행복계획을 이뤄나가게 도와 주세요.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