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눈여겨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오늘 얘기는 어제 빵의 기적과 잇닿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빵의 기적을 많게 하신 주님께서 당신은 기도하러 산에 가시고,
제자들만 먼저 호수 저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군중의 배고픔은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고 바로 배를 채워주시는데
제자들의 곤경은 보시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왜 군중의 배고픔은 해결해주시고 제자들의 곤경은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주님의 사랑을 믿는 우리는 그것이 사랑차별이 아니고
사랑의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다른 의도가 뭐죠?
그런데 주님의 다른 사랑의 의도 전에 복음서의 의도를 먼저 봐야겠습니다.
복음서는 주님의 두 가지 사랑 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겁니다.
세상사적으로는 당근과 채찍의 사람 다루는 법을 얘기하지만
주님께선 위로와 단련의 사랑 법을 쓰신다는 걸 복음은 얘기하고픈 겁니다.
저는 전 두환 씨와 군 생활을 같이 했습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분은 저의 사단장이었고 저는 말단 부대 하사관이었지요.
그분은 부대를 당근과 채찍 그러니까 상과 벌로 잘 다스렸고
그래서 부대는 사기충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만 있었으면 그의 지도력이 빛났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욕이 있었기에 그의 지도력은 깡패두목과 같이
자기를 따르면 살게 해주고 반대하면 가차 없이 죽이는 식이 되었고,
그래서 광주학살을 서슴없이 자행하였고 수많은 젊은이가 죽어갔습니다.
(그런 것인데 얼마 전 그의 부인은 그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함)
당근과 채찍은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한 거지 사랑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거지 너를 위한 게 아니라는 말이고
그 하는 짓이 사랑이 아니라 술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시는 것은 사랑이고
당근과 채찍이 아니라 위로와 단련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군중에게는 빵을 사랑으로 주신 것이고,
단련이 필요한 제자들에게는 시련을 사랑으로 주신 겁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먼저 그리고 따로 보내시면서
풍랑을 만나게 될 것을 미리 아셨을 것이고 당신 예상대로
풍랑을 제자들이 만나지만 그것을 보시고도
시련을 끝까지 당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제자들은 그 위태로운 순간을 이겨내려 온갖 힘을 다 쓰지만
그것이 주님 없으면 헛수고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주님은 그때야 나타나시고 배를 타시자 바람이 멎습니다.
이것은 잘 아시다시피 우리의 인생길을 상징하는 거지요.
우리의 인생길에는 이런 위태로운 순간이 참으로 많고,
주님이 안 계시면 우리 인생은 풍랑으로 가라앉습니다.
제 지론이지만 흔들리면 붙잡게 되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격하게 뒤흔드는 시련을 주시는데
그것은 주님을 꽉 붙잡게 하기 위한 사랑임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흔들리니까 붙잡게 되네요
근데 슬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