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성탄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지만
사랑이 우리에게 오신 거라고 바꿔 말해도 되겠지요.
그러기에 내게도 주님이 오시어 탄생하셨다면
내 안에 사랑이 있어야 실제로 탄생하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내 안에 사랑이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기도할 것이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오늘 독서는 얘기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독서는 기도할 때의 몇 가지 지침을 줍니다.
첫 번째는 청할 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청하라고 합니다.
간혹 사랑으로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할 때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의 병이 낫게 되기를 당연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 뜻이고 하느님의 뜻은 다를 수도 있고,
아무튼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모르는데
이럴 경우 제가 어떻게 기도해야겠습니까?
저는 보통 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
제 뜻이 나쁜 것이 아니고 사랑이기 때문이고,
저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이 제 뜻과 다를 수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저는 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과 다를 뿐 제 뜻이 나쁜 뜻이 아니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시라’고 결국은 그리해야겠지요.
두 번째 지침은 죽을죄를 진 죄인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올바른 가르침, 그러니까
주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가르침일까요?
죽을죄를 졌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용서해주십시오.
이렇게 청한다면 그 죄가 아무리 크고 죽을죄일지라도
하느님께는 죽을죄가 아니고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전두환 전 대통령 얘기를 했는데 이 분은 아직도
광주에서의 학살을 자기의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용서란 용서를 청하는 사람에게 해주는 것이지
죄를 인정치 않는 사람에게는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일본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 저지른 죄가 커서가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인지
동서화해의 뜻에서인지 감옥에 간 그분을 사면해줬습니다.
그러나 그를 풀어준 것은 그에 대한 원한을 내 안에 뽑아낸 것일 뿐,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한 것이지 그를 위한 것, 다시 말해서 용서는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 그를 위해 할 것은 죄를 뉘우치라는 권고이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면 회개하고 용서청하는 그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뿐인데
그런데 그가 뉘우치고 용서청하길 거부한다면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을죄와 용서할 수 없는 죄란 회개 않는 죄이지 큰 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느님도 용서할 수 없고 그래서 죽을죄는 회개 않는 죄이고,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우리일지라도
그가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할지언정
그 죽을죄, 곧 회개하지 않는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