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죽음과 종말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과 종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나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멀리 있는 것인가, 가까이 있는 것인가?
혐오스러운 것인가, 사랑스런 것인가?
종말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이별인가, 또 다른 만남인가?
단절인가, 이어짐인가?
느닷없는 것인가, 채비된 것인가?
지난 한 주간 저는
가까운 사람들 주변에서 일어난 죽음을 많이 접했습니다.
저희 형제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저와 가까운 수녀님의 고모와 동생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의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형제의 어머니는 연세도 높으시고 오랫동안 편찮으셨기에
저희 형제도 침착하게 그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다른 두 분의 경우는 너무도 느닷없는 죽음이기에
보는 저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안타까운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의 고모와 동생은 95세 된 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새벽 미사를 가다 빗길 교통사고로 동생은 즉사하고
고모는 당신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혼수상태라고 하는군요.
만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 아들을 보낸 어머니는 어떻게 되고
고모마저 돌아가시면 홀로 남은 할머니는 어떻게 됩니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의 경우도 정말 예고 없고 뜻밖이었습니다.
60대였지만 건강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날도 등산 가셔서 포도주를 하시다
포도주의 단맛을 따라 병속에 들어와 있던
벌에 목구멍이 쏘여 헬기로 후송되는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저는 이런 죽음 묵상을 하였습니다.
죽음은 예고 없지 않지만
언제 어떻게 죽는지는 참으로 예고되지 않습니다.
할머니 때문에 새벽 미사에 참석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를 위해
일찍 일어나 어머니를 성당에 모셔다 드리는 젊고 착한 아들이
할머니보다,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것은 참으로 예상치 못한 죽음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죽음입니다.
또 다른 죽음 묵상은 죽음이란 자기 안에서 생명이 죽는 것일 뿐 아니라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이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 가족들과 지인들과 이별하든
가족이나 지인이 죽어 이별하든 죽음은 이별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에게 쓰라린 것은 내 생명의 소멸 때문이 아닙니다.
후생을 믿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더더욱 생명의 소멸이 쓰라림이 아닙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쓰라린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생이별도 견딜 수 없는 쓰라림인데
죽어 이별은 너무도 견디기 힘든 쓰라림입니다.
생이별로 그가 없음은 허전함에 그치지만
죽어 이별하여 그가 없음은 나 살아 있어도 허무합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그가 이토록 나를 차지하고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그가 있음이 바로 내가 있음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이 깨달음을 지금 살아서 느낀다면
그가 있기에 내가 있는 삶을 지금 살아갈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 부럽지 않은 사랑의 행복을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니 그래도 우리는 이별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사랑 관계를 배워 익혀야 합니다.
죽었어도 사랑하는 사랑을 배워 익혀야 하고
이별 중이어도 만나는 만남을 배워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초월적인 하느님 사랑이요
하느님 안에서 통공을 하는 사랑입니다.
많이 생각하는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과 종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나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멀리 있는 것인가, 가까이 있는 것인가?
혐오스러운 것인가, 사랑스런 것인가?
종말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이별인가, 또 다른 만남인가?
단절인가, 이어짐인가?
느닷없는 것인가, 채비된 것인가?
지난 한 주간 저는
가까운 사람들 주변에서 일어난 죽음을 많이 접했습니다.
저희 형제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저와 가까운 수녀님의 고모와 동생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의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형제의 어머니는 연세도 높으시고 오랫동안 편찮으셨기에
저희 형제도 침착하게 그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다른 두 분의 경우는 너무도 느닷없는 죽음이기에
보는 저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안타까운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의 고모와 동생은 95세 된 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새벽 미사를 가다 빗길 교통사고로 동생은 즉사하고
고모는 당신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혼수상태라고 하는군요.
만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 아들을 보낸 어머니는 어떻게 되고
고모마저 돌아가시면 홀로 남은 할머니는 어떻게 됩니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의 경우도 정말 예고 없고 뜻밖이었습니다.
60대였지만 건강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날도 등산 가셔서 포도주를 하시다
포도주의 단맛을 따라 병속에 들어와 있던
벌에 목구멍이 쏘여 헬기로 후송되는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저는 이런 죽음 묵상을 하였습니다.
죽음은 예고 없지 않지만
언제 어떻게 죽는지는 참으로 예고되지 않습니다.
할머니 때문에 새벽 미사에 참석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를 위해
일찍 일어나 어머니를 성당에 모셔다 드리는 젊고 착한 아들이
할머니보다,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것은 참으로 예상치 못한 죽음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죽음입니다.
또 다른 죽음 묵상은 죽음이란 자기 안에서 생명이 죽는 것일 뿐 아니라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이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 가족들과 지인들과 이별하든
가족이나 지인이 죽어 이별하든 죽음은 이별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에게 쓰라린 것은 내 생명의 소멸 때문이 아닙니다.
후생을 믿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더더욱 생명의 소멸이 쓰라림이 아닙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쓰라린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생이별도 견딜 수 없는 쓰라림인데
죽어 이별은 너무도 견디기 힘든 쓰라림입니다.
생이별로 그가 없음은 허전함에 그치지만
죽어 이별하여 그가 없음은 나 살아 있어도 허무합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그가 이토록 나를 차지하고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그가 있음이 바로 내가 있음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이 깨달음을 지금 살아서 느낀다면
그가 있기에 내가 있는 삶을 지금 살아갈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 부럽지 않은 사랑의 행복을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니 그래도 우리는 이별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사랑 관계를 배워 익혀야 합니다.
죽었어도 사랑하는 사랑을 배워 익혀야 하고
이별 중이어도 만나는 만남을 배워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초월적인 하느님 사랑이요
하느님 안에서 통공을 하는 사랑입니다.
7년전 사랑하는 아빠와 4년전 18개월 아래 화가였던 여동생..
아직도 길을 가다가 누가 '언니야~"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물이 쏟아져 종일 마음이 슬픕니다..
"죽었어도 사랑하는 사랑을 배워 익혀야 하고
이별 중이어도 만나는 만남을 배워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초월적인 하느님 사랑이요
하느님 안에서 통공을 하는 사랑입니다 "...
이 사랑을 이제는 배워서 익히고 싶습니다.
그가 있기에 내가 있는 삶을 지금 살아갈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 부럽지 않은 사랑의 행복을 사는 삶입니다.
죽었어도 사랑하는 사랑을 배워 익혀야 하고
이별 중이어도 만나는 만남을 배워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초월적인 하느님 사랑이요
하느님 안에서 통공을 하는 사랑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