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고 하시는데 등불은 침상 밑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 중에 등불을 켜서 함지나 침상 밑에 놓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왜 이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지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또 있습니다.
가진 자가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그마저 빼앗길 거라 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 자비로우신 주님은 가난한 자를 더 가엾이 보시고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더 주실 거 같은데
부자에게 오히려 더 주시고 가난한 사람의 것은 그것마저 빼앗으신다니
이런 하느님은 낯설고 이상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등불을 등불이라고 생각지 않는 사람이
등불을 등경 위에 놓지 않고 침상 밑에 놓고,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고약한 생각 때문에 빼앗길 거라는 얘깁니다.
한 번 우리 자신을 생각해봅시다.
진정 가진 것이 없습니까?
그래서 줄 것도 없습니까?
가진 것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안 주셨다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안 주셨기에 줄 것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됫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됫박을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됫박을 갖고 있습니다.
됫박이 작으면 조금 주지만 받는 것도 그만큼 적게 받습니다.
줄 줄 모르거나 인색한 사람이 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이치입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있지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더 벌어들이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땅속에 그것을 묻어뒀다가 그대로 갖다 바칩니다.
이 사람은 하느님을 인색하고 무서운 분으로 알고 있어서 그리 했다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그 한 달란트를 뺏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셨는지 오늘 성찰해야 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재물을 주셨습니다. 안 주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사랑을 주셨습니다. 안 주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셨습니다. 안 주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주신 바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주님이 우리에게 빛이요 우리 발을 비추시는 등불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기에서 다윗은 “주님은 저의 등불”(22,29)이라 하고
시편은 “주님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119,105)이라고 합니다.
이 하느님과 하느님 말씀을 침상 밑이나 함지 속에 두지 말고
우리는 널리널리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빛이 되고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키도 하시지요.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빛이신 주님을 받고,
그 빛을 받아 이제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고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하시는 일도 우리를 비추시며
타오르는 둥불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