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이번 봉헌축일을 맞이하여 저는 성찰과 반성을 진지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봉헌생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저의 봉헌생활에 대해서는 깊이 반성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저희 수도자들의 수도생활이 진정 봉헌을 사는 삶인지,
다른 수도자가 아니라 제가 봉헌의 삶을 잘 살고 있는지 반성을 한 겁니다.
왜냐면 오늘 축일의 의미를 놓고 볼 때 저는 봉헌되지도 않고,
봉헌하지도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는 봉헌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위해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이라고 하지만 주님이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부모에 의해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봉헌되신 겁니다.
여기서 타의란 두 가지이고 두 부모의 뜻입니다.
한 부모는 하느님 아버지이고 다른 한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주님께서는 세상에 봉헌되셨습니다.
이것이 육화이고 성탄이며 이로부터 40일이 되는 오늘 2월 2일에
육신의 부모에 의해 주님은 하느님께 봉헌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리고 요즘의 저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봉헌되려고 하지 않고 나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세상 결혼과 비교하면 옛날에는 부모의 뜻에 따라
시집장가 드는데 요즘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자기실현을 위해 아예 결혼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쉬운 예로 요즘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라는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겁니다.
이로 인해 순종이 근본에서부터 되지 않아 봉헌되려 하지 않는 겁니다.
다음으로 봉헌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봉헌하지도 않습니다.
봉헌되는 것이 순종의 차원이라면 봉헌하는 것은 사랑의 차원이지요.
나를 하느님과 세상을 위해 바치려는 희생적 사랑이 봉헌이고
이것이 오늘 초 축복을 하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나를 불태우고
세상 구원을 위해 나를 바치는 그 뜨거운 사랑이 제게 얼마나 부족한지!
제가 처음 수도원에 들어올 때, 특히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첫 서약을 할 때
저는 세상 구원을 위해 저를 바치겠다고 감히 저를 불태웠습니다.
요즘의 저를 보면 이때와 비교하면 겸손해진 측면도 있지만
너무 가련해져서 세상 구원이 아니라 저의 구원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요즘 새벽에 혼자 미사드릴 때 종종 다른 불은 끄고 촛불만 켜고 드리는데
저 촛불처럼 나를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구나 하고 반성을 하고
나는 봉헌치 않고 미사만 대신 열심히 봉헌하는구나 하는 반성도 합니다.
그래서 불태울 사랑도 부족하고 봉헌하려는 의지도 부족한 저를
주님께서 가련하게 보시고 사랑을 주시고 열정을 주소서 하고
봉헌생활을 하는 수도자의 날에 먼저 저를 위해 기도하고
모든 수도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기도해주시기를....
오늘은 하고 싶은 내맘대로가 아닌 주님께 이끌리는 데로 성모님의 ' 곰곰히' 마음을 그리며 주님 봉헌의 시간을 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