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복음서 저자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기술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도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라는 말에 의미를 두어도 좋을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열두 제자를 부르시다니
각기 흩어져 있던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뜻인가,
열두 제자는 늘 주님 곁에 있지 않았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물론 열두 제자는 늘 주님 곁에 있었고 주님과 내내 같이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마 제자들이 많았는데(참고로 루카복음에서는 일흔두 제자를 또 파견함)
그중에서 열두 제자를 파견할 제자들로 뽑으시고 부르신 것일 겁니다.
사실 모든 사람을 다 멀리 파견할 사람으로 부를 수는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에게 해외선교사 성소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해외선교사 성소나 국내 공소 파견 성소는 일부에게 주어지는 특별성소지요.
이런 특별성소의 선교사는 오늘 주님 말씀처럼
살던 곳에서 떠나야 하는 사람이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어딜 가거나 파견되어 가면서 뭘 가지고 가는 것은 많은 짐을 지고 다니고,
옷을 많이 껴입고 뜀박질하려는 것처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기에
가지고 떠나려 해서는 안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더라도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지고 떠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업을 위한 파견, 예를 들어 건설 사업을 위해
중동에 파견되는 것이라면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가지고 가야겠지만
주님의 사업을 위한 파견은 주님 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하느님의 능력 외에 어떤 능력에 의존하지 말고 가야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갈 수는 없다는 사람이
특별성소의 선교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갈 수 있어도
근원적으로 특별성소의 선교사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도 놔두고 가족도 놔두고 떠나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은 떠날 수 없는 사람이지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애착 때문에 집이나 가족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 때문에 떠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선교 성소가 없는 것입니까?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선교는 보편성소입니다.
다만 파견되는 곳이 해외가 아니고 시골이 아닐 뿐 어디든지 파견됩니다.
그래서 보편적인 선교성소를 사는 사람에게 가정 파견은 기본이고
직장 파견, 복지시설 파견, 장터 파견, 이웃가정 파견 등 다양하며,
파견 기간도 필요로 하는 만큼 파견되는 것이니 매우 유연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사 의식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든 선교사이고 어디를 가든 선교사로 간다는 의식,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것이 아니라
파견되는 곳에 가고 파견이 되면 언제고 가겠다는 선교사 의식 말입니다.
결론은 열두 제자뿐 아니라 누구나 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갈 곳, 내가 파견된 곳은 어딘지 성찰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