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를 하고 돌아온 데다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많이 시달려 지쳐있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피해가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는 많은 사람들이 피해간 그 외딴 곳까지 따라오는데
얼마나 서둘러 따라왔냐 하면 배로 온 주님보다 먼저 도착할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집요하고 염치가 없는 군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염치가 없다고 하시지 않고 가엽게 여기십니다.
그렇다면 군중은 어떤 면에서 가여운 것입니까?
우리는 즉각 굶주림 때문에 가엽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주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배불리시잖습니까?
그런데 복음은 우리 생각과 달리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가엽답니다.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사망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즉시 측은지심이 일어나고, 도와줘야겠다는 마음도 생깁니다.
반면에 많이 가졌는데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나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술이나 먹고 삶을 포기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엽다기보다는 한심하다거나 심지어 밉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더 가여운 사람은 병들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많이 가졌는데도 욕심 부리는 사람이고 방황하는 사람입니다.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고 배불러도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조금 가져서 가여운 것이 아니라 많이 가져도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 가엽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가여운 것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이 가여운 것이지요.
제가 외국에 처음 나간 곳이 1987년 필리핀 정의평화 국제회의였습니다.
그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Smoky Mountain이란 곳을 방문하는 거였는데
쓰레기더미를 뒤져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러 간 것입니다.
둘러보는 중에 한 여인이 벌거벗은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그 더러운
쓰레기더미에서 바나나 하나를 주워 자기도 먹고 아기에게도 먹이는데
그것을 같이 본, 유럽에서 온 신부님이 ‘우리나라에는
개를 위한 상점도 있는데’하며 불쌍하다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연민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은 저는 거부감이 들면서
속으로 ‘당신네 나라 사람들보다 이 아낙이 더 행복하다. 당신네 나라
자살률이 이곳 필리핀보다 훨씬 높지 않으냐?’하고 반박을 하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얘기한 것은 비딱한 심사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 아낙이 그런 곳에서 먹는 모습을 보인 것이 겸연쩍었는지
씩 웃는데 그 얼굴이 그야말로 평화 그 자체였고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이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얼굴이었지요.
이 여인의 그 평화로운 얼굴이 행복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행복이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만족의 문제라고.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만족할 줄 모르면 불행하고,
반대로 아무리 없어도 행복할 줄 알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그러고 보니 저도 어렸을 때 가난했지만 가난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고,
이 세상을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을 때 죽고 싶었지요.
그리고 시한부인 사람들이 그 고통에도 오히려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대사제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히브리서를 오늘로 끝내며
화답송은 아쉬울 것 없고 푸른 풀밭에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에 대해
노래하는데 주님께서는 진정 살 길, 행복의 길을 알려주시고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의 참 목자이심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