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갈망하는 기특한 젊은이를,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을 성실히 지켜온 기특한 젊은이를 칭찬합니다.
사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욕심일 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런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런 욕심을 부리고,
또 십계명을 그렇게 성실히 지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그래서 그런 사람도 많지 않은데 이 젊은이가 성실히 지켜왔다 하니
주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면서도 한 가지가 부족타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수만 가지 계명을 다 지켜도
부족한 것 하나가 뭘까 생각게 됩니다.
뒤 이어 하시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씀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포기하는 것-가난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웃 사랑
주님을 따르는 것-주님 사랑
문맥상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어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신 거지만
만일 세 가지 중에서 또 하나를 고른다면 그 한 가지 부족한 것,
그러니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난입니까, 이웃 사랑입니까, 주님 사랑입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 사랑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주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어야 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것을 이웃에게 주는 것이어야겠지요.
가진 것을 다 팔아 이웃에게 주고 정작 주님을 따라 나서지 않는다면
이 또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는 것이 되겠지요.
제가 과거에 아주 잘못하였고 지금도 가끔 그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은 열심히 하고
정작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를 처음 접하고 그 프란치스코에게 처음 열광했을 때
저에게는 부자인 프란치스코가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하게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대자유인이 된 것이 무척 멋있어 보였고
그래서 그런 프란치스코를 따르려고 무척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를 따르려 했고,
프란치스코를 따른 것도 그의 가난과 자유를 따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소유의 포기/가난과 이웃 사랑과 주님을 따름이 다 한 묶음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가난도 이웃 사랑도 주님을 따르기 위한 것이고,
주님을 따라서 곧 주님처럼 가난도 하고 이웃 사랑도 해야 하는 겁니다.
왜 괜히 가진 것을 다 팝니까?
왜 괜히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버리고 떠납니까?
왜 내 소유를 팔아 부모 형제에게 주지 않고 생판 모르는 이웃에게 줍니까?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마치
사랑에 눈 먼 연인들이 그 사랑을 가족이 반대하니까
부모형제 버리고 그리고 가진 것 다 포기하고 연인을 따라가는 것과 같지요.
너무도 그를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그만 있다면 다른 것 아무 것 없어도 괜찮게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그가 당신이라는 오늘 주님의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