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광야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Wilderness: 1872)
작 가 : 이반 크람스코이 (Ivan Kramskoi, 1837-1887)
크 기 : 캠퍼스 유채 (180cm × 210cm)
소재지 : 러시아 모스코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Tretyakov Gallery)
오랫동안 반공이 국시였던 우리 처지에서 공산 세계의 종주국인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거리감 이전 거부감의 대상으로 정착되었기에 러시아에 대한 모든 것은 종교와는 거리가 먼 것이란 생각이 정착되어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예술성과 종교성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심원하고 깊은 역사의 유산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가난한 상공인 계급 집안 출신으로 미술 공부를 하면서 젊은 시절 러시아의 문화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예술가로서 기량을 끼웠다.
그러나 그는 작가로서의 기량을 키우면서 예술가로서 자기다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기가 몸담아야 할 러시아 예술계의 현실과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관에 큰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시대 러시아를 지배하던 예술관은 철저히 전통과 특정 부류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가 다니던 아카데미는 당시 러시아 예술 학교의 모델과 같은 곳이었는데, 학교 당국의 요청은 작가의 신념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귀족들이나 부유층들의 기호를 만족시켜 돈과 명성이라는 두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작가와 14명의 의식 있는 학생들은 이것을 파격적으로 거절함으로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이라는 사회출세의 발판을 놓치는 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가 가야할 예술가로서의 길은 도덕적 바탕에 기본을 두어야 하기에 이런 삶의 예술을 하기 위해선 당연히 통과해야 할 고통의 관문으로 생각하면서 의연히 자기의 길을 걸었다.
작가의 이런 결단은 러시아 일반 민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러시아 예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길을 열었고 이것은 19세기 후반 러시아 예술 발전에 극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즉 예술은 부르주아들의 기호품이 아니라 서민들의 정서를 수용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바탕에서 작품에 대한 거침없이 정확한 비판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또한 예술의 건전한 평가를 위한 객관적 판단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작가가 활동하던 1870년대 러시아 사회는 불안 요소가 극도에 달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러시아 공산 혁명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산업 시설에서는 동맹 파업이 속출하고 사회의 많은 부분이 그전까지 감히 어떤 비평을 용납하지 않고 종교적 신조처럼 그냥 믿어오던 전제 주의적 사고방식에 의문점을 재기하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 중에 서서히 태동한 민주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은 사회에 빛의 역할을 해야 할 예술가로서의 의무와 사명에 눈뜨면서 서구 예술을 모방하는 형태의 기존 화풍보다 러시아 민족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길을 트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 처지에서 작가는 전통의 집착에 안주하는 아카데미 학파에서 이탈해서 순회 예술가라는 파격적 형태의 작품 활동으로 러시아 예술의 아버지로서의 새 역할을 시작했다.
작가는 잘 차려진 전시장에 사회 기득권자들을 모우는 전통적 예술이 아니라 여러 도시와 지방을 다니며 이동 전시로서 예술을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그들의 의식 계발을 도우는 교육적 역할에 관심을 키우게 만들었다.
요한 복음을 제외한 다른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가셔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12-13)
다른 복음에서는 이 유혹의 내용을 더 풀이해서 단식으로 허지진 주님께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마태4:3)과 성전 꼭대기에서 밑으로 떨어져도 하느님이 지켜주실 터이니 해보라는 유혹(마태4:6)과 높은 산에서 사탄에게 경배만 하면 아래에 보이는 모든 세상을 주겠다는 유혹(마태4:10)을 했으나 주님은 완강히 물리치셨다는 내용이다.
수 세기에 걸쳐 작가들은 이 작품의 내용을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세 방식의 유혹을 그 시대 정서에 맞게 표현함으로서 항상 유혹에 노출된 삶을 살아야 하는 크리스챤들에게 주님의 모범을 따라 신앙에 반대되는 유혹을 분연히 거부하면서 초연해야 한다는 권고를 주어 왔다.
사실 크리스챤 신앙의 주요 과제가 덕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것의 방해물이 바로 유혹으로 여겼기에 항상 중요한 것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그러나 작가는 이런 전통적 표현에서 벗어나 자신의 철학과 도덕적 기준을 담아 이 작품에 접근했다. 한마디로 전통적인 유혹에 대한 교리 해설적 접근이 아니라,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몸부림치던 러시아 사회 정치적 흐름이 반영된 인본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 했다.
아침 동이 트는 시간 바위투성이의 황무지 바위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 살아 있는 생명은 잡초 하나도 보이지 않는 철저한 돌무지 황야이다.
주님께서는 지난밤을 세워 기도하신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약간은 초췌하고 피곤한 모습이시다. 그분의 맨발은 자기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맨발로 걷기에 바위 투성이의 그분 주위는 너무도 어려운 곳이다.
굳게 잡은 그 손은 너무도 열렬한 기도의 마무리를 아직 짖지 못한, 아직 기도가 끝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고 있다.
그분은 성부의 뜻을 순종해서 세상에 온 인간 예수로서 앞으로 그가 걸어야 할 미지의 길에 대해 깊은 의문과 불안에 찬 모습이다.
성부의 뜻을 따른다는 일념으로 세상에 와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처지에 동참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으나 그 분의 미래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불확실성과 결정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기존 작가들은 성서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유혹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작가는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 현실 속에서 러시아 국민들에게 사람다운 삶의 길을 제시하는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도덕성을 지키는 것이란 것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예수님의 고뇌는 바로 작가가 몸담았던 러시아 현실에서 백성들에게 필요한 삶의 방향과 지혜를 줄 수 있는 예술을 창출하기 위한 작가의 고뇌이기도 했다.
작품의 예수님은 성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성서에 나타나는 3개의 유혹을 좁게 해석해서 인간이 제어해야 할 욕망과의 투쟁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살 수 있는 이상적 사회 건설의 건설자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이다.
예수님의 유혹은 인간 삶의 큰 유혹인 세 개의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폭넓고 심원하게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뇌의 연속이 바로 예수님의 광야 삶의 핵심이라고 작가는 생각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비극 가운데 하나인 햄릿(Hamlet)에 나오는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 라는 고민과 비슷한 것이다.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해 가는 길이 평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예수님의 광야 고행은 단순한 개인 수덕적 차원이 아니라 “세상에 불을 놓기 위해 오신”(루카 12,49) 예수님의 혁명적 사명을 확인하기 위한 전초적 단계의 신앙체험이었다.
러시아 미술사를 저술한 A.I 조토프는 작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크람스코이가 그린 인간은 탐구심이 강한 인간, 진지하고 이성적인 인간,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인간, 자신과 타인에게도 엄격한 인간이다. 그것은 시대적 모순과 사회적 병폐를 절실히 느끼고 있는 민감한 사색가이다.” (러시아 미술사 246P)
이런 관점에서 작가가 그린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급변하는 러시아의 현실을 꿰뚫어 보면서 러시아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자기의 사명임을 깊이 의식한 작가의 자화상으로도 볼 수 있다.
작가의 이런 신념과 화풍은 여러 후배 화가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러시아에 새로운 화풍을 창출했기에 그를 뛰어난 미학 전문가로 부르기도 한다.
기득층 인사들의 눈요기 감으로서의 예술은 언제나 매력적이면서 많은 단골들을 포섭할 수 있기에 예술가들은 이런 취향의 작품 제작에 솔깃할 수 있는 유혹에 항상 노출되게 마련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이 유혹에서 탈피하고자 결연히 일어났기에 예술가로서 장래가 보장되는 아카데미의 졸업장을 포기하고 이동 전시 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인생 여정은 바로 유혹을 이긴 예수님의 인생과 같기에 그의 초상화와 이 작품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화단에는 어느 시대에나 어용화가라는 집단이 있었으며 이들의 예술 활동은 기득권자들의 구미를 맞추어 주는 것으로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 역할이었다.
작가의 이 작품은 작가의 인생 이해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어용화가로서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 선택 보다는 불안정하고 또 남으로부터 오해를 받는 작품 활동을 통해서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 사회 변혁에 필요한 민주적 사고방식, 민중의 의식 계발에 이바지 하는 것을 삶에 투신하기 위해선 예수님의 유혹은 모든 크리스챤들이 겪어야 하는 필주적 신앙 입문이라는 것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알리고 있다.
작가에 있어 예술가의 사명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로 살고픈 모든 크리스챤들이 뛰어 넘어야 할 유혹의 과정이다.
진리의 주체로서 하느님을 가르치는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전통 신학자들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인정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고 제시하는 새로운 신학은 교회 안으로부터 반대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하기에 예수님의 유혹에 대한 신념이 부족한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다.
근세 보수 전통이 제도권 교회의 보호를 받으면서 교회가 시대 표징에 응답을 주지 못하는 퇴행성 태도로 세상에 실망요인으로 등장하는 안타까운 교회 현실에서도 예수님의 유혹을 용감히 뛰어넘은 예언적인 신학자들이 있어 자랑스럽다.
남미 해방신학자로 활동하셨던 브라질의 돔 헬더 카라마 (1909-1999) 대주교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셨다.
“사제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면 그는 성인이라 불리고 많은 사람의 칭찬을 받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인지 사회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하면 빨갱이라는 비난을 듣게 된다.”
“꿈을 가지십시오, 꿈을 한 사람이 꾸면 그것은 한 사람의 꿈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면 그 꿈은 현실이 됩니다.”
이 작품이 오늘 그리스도교회와 신자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자화상을 정립하는데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