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는 나한테 마치 맡겨놓은 것이 있는 것처럼 달라는 소리를
어찌 그리 쉽게 하느냐고 타박하는 어머니들을 많이 봅니다.
사실 저는 어머니들의 이런 타박의 심정에 백분 동감합니다.
요즘 사람들 어찌 그리 달라는 소리를 잘하는지 당당합니다.
저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달라는 소리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어도 제가 알아서 끊었고 등록금도 말을 꺼내기 어려워
마감 시간이 될 때에야 겨우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저였으니 요즘 사람들 달라는 소리 너무 잘하고 돈 없어 주지 못하면
오히려 신경질부리고 부모가 되어 부모노릇도 못하느냐는 투입니다.
이런 요즘 사람들이 얄밉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면서도 부럽기도 합니다.
그렇게 줄 부모가 있다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부모를 믿고 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이렇게 믿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렇게 믿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이렇게 믿고 청하라고 하십니다.
자녀가 청하는 것 그리고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하느님께서는 이런 부모보다 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실 거라 믿고 청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부모만큼 믿지 못하는 거겠지요.
그러나 그렇긴 하지만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또 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인간에게 청할 것은 부모/인간에게 청하고
하느님께 청할 것은 하느님께 청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청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곳에서부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때는 부모건 남편이건
다른 사람에게 청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니 다른 사람에게 청하고
인간의 힘으로 안 되니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 것을 믿는 다른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이려니 하면서 넉넉하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도 그러다가 절박한 상황이 닥치면 다 하느님께 올 것이니.
오늘 에스텔의 경우가 바로 그렇지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이 망한 후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었지만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음모에 의해 자신을 비롯해
유대인 모두가 몰살당하게 되자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에스텔 주변에 왜 사람이 없습니까?
왕의 대신이자 삼촌 모르도카이도 있고 수많은 유대인이 있었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과 유대인을 구해줄 분은 하느님뿐인 거지요.
우리도 주변에 수없이 사람이 많아도 나와 하느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절박함과 외로움이 하느님을 만나는 지점입니다.
절박하지만 아무도 없는 이 때가 하느님의 때이고 구원의 때입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그러나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도 에스텔처럼 눈을 들어 하느님을 보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