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3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되찾은 이야기인데,
앞의 두 가지 비유와 오늘의 비유가
조금은 다른 것처럼 생각됩니다.
앞의 두 비유, 즉 되찾은 양의 비유나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찾고는
기뻐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오늘의 비유는 좀 다릅니다.
물론 오늘 비유의 아버지도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들을 찾기 위해서
헤메며 돌아다니지는 않지만,
아들이 돌아올 때 멀리서도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계속해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찾아 돌아다니지 않았다는 점은
아버지가 아들을 찾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생각되게도 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특성상,
아들이 스스로 돌아온다는 것이 중요하기에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때로는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를 부르시거나
적어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면,
거기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께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우리의 의지로 다시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억지로 끌려 왔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언젠가 다시 하느님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발적으로 온 것이라면,
그 관계에 좀 더 오래, 좀 더 깊게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배고품의 상황에서,
고통의 상황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삶의 무게 때문에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간 순간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그 부르심은 보통 고통으로 다가오는데,
그 고통 속에서 다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십니다.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왜 나를 떠나갔는지,
떠나가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도 스스로 생각할 때,
이러한 것은 용서 받지 못할 것이야 하면서,
하느님께 돌아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
그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렇기에 언제든 우리가 원할 때
돌아갈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
항상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3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되찾은 이야기인데,
앞의 두 가지 비유와 오늘의 비유가
조금은 다른 것처럼 생각됩니다.
앞의 두 비유, 즉 되찾은 양의 비유나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찾고는
기뻐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오늘의 비유는 좀 다릅니다.
물론 오늘 비유의 아버지도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들을 찾기 위해서
헤메며 돌아다니지는 않지만,
아들이 돌아올 때 멀리서도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계속해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찾아 돌아다니지 않았다는 점은
아버지가 아들을 찾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생각되게도 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특성상,
아들이 스스로 돌아온다는 것이 중요하기에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때로는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를 부르시거나
적어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면,
거기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께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우리의 의지로 다시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억지로 끌려 왔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언젠가 다시 하느님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발적으로 온 것이라면,
그 관계에 좀 더 오래, 좀 더 깊게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배고품의 상황에서,
고통의 상황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삶의 무게 때문에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간 순간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그 부르심은 보통 고통으로 다가오는데,
그 고통 속에서 다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십니다.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왜 나를 떠나갔는지,
떠나가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도 스스로 생각할 때,
이러한 것은 용서 받지 못할 것이야 하면서,
하느님께 돌아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
그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렇기에 언제든 우리가 원할 때
돌아갈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
항상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밉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