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데
이 결의를 이끌어낸 대사제 카야파는 이런 논리를 펼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낫다.”
정치적인 논리이고 결정이지만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그 한 사람이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
주님 한 분이 죽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은 분명 맞는 결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인 결정이 영적인 면에서도 잘된 결정이라고
요한복음은 그 결정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민족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질적으로 다르지요.
카야파는 그야말로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민족을 구원하는 것일 뿐인데 비해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죄스런 세상에서 구원하시는 것이니 차이가 크지요.
그런데 우리가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주님의 구원이 카야파의 구원과
다르다는 점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야파의 결정을 통해서도 세상의 구원을 이루시고,
인간의 정치와 악의 방법을 통해서도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의 반 이민 정책이나 반 이슬람-친 이스라엘 정책 등이
매우 반 복음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믿음과 희망이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혹 이런 트럼프를 이용해서 북한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이것은 제가 북한을 위한 일을 하면서 얻은 믿음과 희망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북쪽 상대자를 믿고 일을 추진했는데 과정에서 불신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북쪽 동포를 생각하며 그리고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불신하면서도
일을 계속 추진했는데 끝장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이 닥쳤을 때 하느님께서는
북쪽의 높은 사람을 통해서 상황을 해결하시는 체험을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평양에 복지시설을 세울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저는 하느님께서 저만 당신 일의 도구로 쓰지 않고, 우리가 소위
빨갱이라고 생각하는 그들도 당신 도구로 쓰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기 전에는 욥기에서 하느님이 사탄을 이용하여
욥을 치시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당신과 당신의 나라로 이끄시는데
하느님은 천사의 카드와 악마의 카드를 다 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선하신데 왜 세상에 악이 있고 고통이 있는지,
풀 수 없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고민도 하는데 이것이 그 해답의 일부이고,
유다가 태어나 배반을 한 것도 이것을 통해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하느님을 떠나고,
자신만 죄를 짓고 하느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의 경우 남도 죄 짓고 하느님과 교회를 떠나게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죄와 악은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 흩어지게 하지만
하느님은 선의 방법과 악의 방법을 다 동원하여 모으십니다.
그래서 에제키엘서는 오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 이제 떠나가 살던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한 민족으로 만들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예수께서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셨다”
흩어진 자녀들을 모으기 위해 네가 죽으라고 하면 안 되겠지만
주님처럼 나 하나 죽어 흩어진 자녀들을 모으는데 일조하고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은총을 감히 구하는 오늘입니다.
레오나르도 사제의 일을 통해 갈라진 우리 민족이 해방 되고 하느님 갈이 찬미 받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