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곳이 다릅니다.
루카복음에서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은 일체 없고,
그래서일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만 나타나십니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는 주님 부활을 먼저 알게 된 여자들을 통해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씀이 제자들에게 전해지는데 마태오복음에서는
주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나타나신 반면에 마르코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주님을 실제로 뵌 곳이 갈릴래아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두 번 발현하시고
오늘 갈릴래아에서 세 번째로 나타나시는데 그것이 좀 이상합니다.
오늘 복음 21장보다 앞선 20장에서 복음서를 쓴 목적까지 얘기하며
이미 마무리를 지었는데 다시 덧붙여 쓴 것이 오늘 복음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 21장은 어떤 의도, 그러니까 얘기를 마친 다음
더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덧붙인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갈릴래아에서의 다시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갈릴래아에서 무엇을 다시 시작하는 걸까요?
첫째는 하느님 체험과 주님 체험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첫 제자들은 오늘 복음의 체험과 똑같은 체험을 같은
갈릴래아 바다에서 하였는데 주님을 처음 만날 때였지요.
그때 베드로는 스승님이라고 부르다가 고기를 엄청 많이 잡은 다음에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주님은 그때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구세주로 만났지만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구할 승리자 구세주로 여기고 따랐다가
베드로는 사탄 소리를 들은 적도 있고 제자들 간에는 자리다툼도 있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제자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며 그래서 오늘도 고기잡이 허사체험을 첫 만남 때처럼 한
다음에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주님체험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비록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도 쳤지만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적으로 사랑을 한 거였지요.
그래서 수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가 사탄 소리도 들었고요.
이렇게 인간적인 사랑과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들어있는 사랑이
물의 세례가 아니라 불과 성령의 세례로 정화되어 이제
수난의 사랑과 성령의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가 주님으로부터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받는 것은 세 번 배반한 것 때문에 받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옛날처럼 배반의 사랑을 또 하지 않고 정말로 수난의 사랑을 하겠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며 이는 마치 확인사살처럼 확인사랑인 것이고,
여인이 남자의 사랑을 알면서도 묻고 또 묻는 것처럼 확인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거듭 확인한 다음
베드로도 수난의 죽음을 당할 것임을 오늘 복음 마지막에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새로운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데
그것은 또한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양들도 사랑하라고 오늘 베드로에게 당부하시지요.
이는 당신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친 주님의 사랑처럼
수난의 사랑과 목자의 사랑을 하라는 당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과 당부는 베드로에게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사랑을 하는지 그리고 하겠는지 질문을 받고
당부도 받는 것임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