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도행전과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바로
“이끌어 주지 않으면”입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이집트 내시가 예언서 한 부분을 읽고 있으면서 누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필리포스에게 얘기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하느님의 이끄심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에게 올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끌어주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가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해야 함을 오늘 먼저 묵상하고자 합니다.
인도를 받지 않고 제 스스로 가려고 하는 경우가 저에게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잘 아는 사람에게 즉시 알려달라고 하고,
길을 잘 모르면 가르쳐달라거나 인도해달라고 하면 쉽게 가고
안전하게 갈 텐데 우리는 그런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길을 갈 때 보통 남자가 운전을 하는데
모르는 길이니 물어가라고 해도 남자들은 좀처럼 물으려하지 않는다고
자매님들이 얘기하는 걸 종종 듣는데 사실 남자들이 대체로 그런 편입니다.
길과 같이 별거 아닌 것은
아쉬운 소리 하기 싫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있고,
그보다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거절당하는 것이 창피하거나 두렵거나
아예 들어줄 사람이 아니라고 그를 불신하여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을 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지금 내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응급차도 없고 내비게이션도 없으며
외지라서 길을 전혀 모르기에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 병원에 가야합니다.
그래서 서둘러 가는데 길을 잘 모를 것 같은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현재 그분밖에 다른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다.
그분에게 묻겠습니까? 그분의 말을 믿고 가겠습니까?
믿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믿을 것입니다.
내 딸을 살려야 하는 절실함과 간절함이 믿게 하는 것이고,
그 절실함과 간절함이 길을 찾게 하고 발견케 할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길을 몰랐을 때
저는 삶과 죽음을 걸고 그 길/道을 찾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도를 하였고 그래서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태중 교우였고 그래서 신학교에도 들어갔지만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길을 몰라 구도의 길에서 불교로 갔다가,
인도 신비주의자들에게 갔다가 노자와 장자로 가는 방황을 하였습니다.
몸은 수도원에 있는데 불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복음을 이해하면
이해가 더 잘 될 정도였으니 이 방황의 고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결국 방황의 정점에서 수도원을 나갔고 하느님과의 만남이 최고로
간절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해주셨고,
그분의 복음에서 방황을 끝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데,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절히 가고파하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어주시는데 성령을 통해 그리 하시고,
인간과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통해서도 그리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버지께 가는 길이시지만
오늘 이집트 내시에게는 필립포스가 길잡이가 되어준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가는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느님의 이끄심을 잘 받는 우리가 될 뿐 아니라
길 잃은 사람들을 주님께 잘 이끄는 길잡이가 되기로 마음먹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