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옛날에 아이 둘을 둔 엄마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엄마였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 키우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보다 도시에 가서 재봉이나 미용 기술을 배우면
그런 일은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수입도 나을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 교육도 시골보다는 도시에서 받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그래서 엄마가 서울 가서 우리들 있을 곳 마련하고 올 테니
그 때까지 너희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니 아이들은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불안하고 자기들끼리 있는 것이 불안하고,
서울 가는 것에 마음이 들뜨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서울서 사는 삶이 어떨지도 불안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도 심란해 합니다.
있을 곳을 마련하겠다는데도 그것이 그렇게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있을 곳이 거기인지 여기인지 모르겠기에 그러는 걸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있을 곳은 주님이 계신 곳이 아닙니까?
아이가 있을 곳은 어머니가 있는 곳인 거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는 자기 있을 곳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엄마가 있는 곳이 바로 자기가 있을 곳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계신 곳이 바로 주님이 계셔야 할 곳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버지 계신 곳으로 가야 한다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은 아버지께로,
제자들도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야 하는데
이것은 마치 옛날 우리가 기차놀이 할 때의 그것과 같습니다.
향도가 되는 친구가 맨 앞에 서고 나머지 친구들이 뒤따라가는데,
각기 앞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갈 때 끊기면 기차는 탈선하고,
그 재미있는 기차놀이는 끝이 나게 되지요.
그런데 그까짓 기차놀이야 끊겨도 고작 놀이가 끝나는 것일 뿐이지만
천국 가는 기차는 놀이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잖아요?
기차가 탈선하면 전체가 천국에 갈 수 없고,
중간 누구에서 끊기면 그 뒤가 다 천국기차에서 끊기는 거잖아요?
여기서 저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 끊길까?
앞 사람이 빨리 가는 바람에 끊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뒤집어 얘기하면
앞 사람을 따라갈 능력이나 열망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요.
또 열심히 앞 사람만 보고 부지런히 따라가야 하는데
괜히 지나가는 것에 시선이 뺏기거나 걸려 넘어져 끊길 수도 있겠지요.
여기서 저는 또 질문도 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천국 가는 기차입니까?
나 한 사람이 천국 가는 주님 기차에서 끊기면
내 뒤의 사람도 나로 인해 다 이 기차에서 끊긴다고 생각합니까?
지난 주 저는 모 수도원에 가서 공동체생활과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그때 저는 그 수도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의 공동체는 주님은 없이 우중충한 남자들끼리 모여 그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맛대가리 없이 살거나 티격태격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공동체는 하느님 앞에 있는 공동체,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공동체,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공동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