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교만하지만 옛날 더 교만하던 때 저는
비교를 하려면 하느님하고 비교하던지 적어도 聖人하고 해야지
다른 인간하고 비교하여 잘 났다 못 났다 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옛날 신분제가 있을 때 도련님을 머슴 아들과 비교하여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면 칭찬을 들은 도련님이
머슴 아들과의 비교 자체를 수치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심사겠지요.
그런가 하면 대단히 속물적으로
용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 당시 저의 주제였지요.
그러니 그 당시에는 비록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저의 세속성을 뛰어넘으려는 좋은 뜻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지독한 교만이 숨어 있었음을 저도 몰랐던 것입니다.
진정 제가 인간과의 비교를 초월한 그런 경지에 있었다면
그저 하느님 앞에 있을 뿐 아예 비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 우위에 서려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겸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그래서 탁월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씀하듯
우리는 진정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하지 않은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고
하느님 앞에 같이 서 있는 존재입니다.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같이 하느님 뜻을 받드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받든다는 말은
‘함께’라는, 즉 공동체성을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누구는 하느님을 더 잘 흠숭하고 받들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는, 그런 것이 없이
‘모두 똑같이’라는, 즉 평등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어제는 수도원 당가 형제께
외국에 나가 있는 어른께 보낼 선물 좀 사다달라고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본다면
시장가는 김에 사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지만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한 번도 그런 것을 제 손으로 산적이 없는 저의 무의식 안에는
‘나는 그런 것 살 줄 몰라’ 하면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손가락 하나 까닥하려 하지 않음이 숨어있습니다.
부탁해도 되는 사람 따로 있고,
부탁 받아도 되는 사람 따로 있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자기 손가락은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다른 사람 어깨에 큰 짐을 올려놓는 것이
그저 시장바구니 정도라면 그래도 낫겠는데,
그것이 자기 십자가든, 공동체의 십자가든,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신
그래서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닌지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십자가는 지지 않고
칭찬과 영광만 받으려는 그 날도둑놈의 심보가 있지 않은지
오늘 복음을 통해 들여다보는 오늘입니다.
비교를 하려면 하느님하고 비교하던지 적어도 聖人하고 해야지
다른 인간하고 비교하여 잘 났다 못 났다 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옛날 신분제가 있을 때 도련님을 머슴 아들과 비교하여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면 칭찬을 들은 도련님이
머슴 아들과의 비교 자체를 수치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심사겠지요.
그런가 하면 대단히 속물적으로
용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 당시 저의 주제였지요.
그러니 그 당시에는 비록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저의 세속성을 뛰어넘으려는 좋은 뜻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지독한 교만이 숨어 있었음을 저도 몰랐던 것입니다.
진정 제가 인간과의 비교를 초월한 그런 경지에 있었다면
그저 하느님 앞에 있을 뿐 아예 비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 우위에 서려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겸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그래서 탁월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씀하듯
우리는 진정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하지 않은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고
하느님 앞에 같이 서 있는 존재입니다.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같이 하느님 뜻을 받드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받든다는 말은
‘함께’라는, 즉 공동체성을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누구는 하느님을 더 잘 흠숭하고 받들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는, 그런 것이 없이
‘모두 똑같이’라는, 즉 평등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어제는 수도원 당가 형제께
외국에 나가 있는 어른께 보낼 선물 좀 사다달라고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본다면
시장가는 김에 사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지만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한 번도 그런 것을 제 손으로 산적이 없는 저의 무의식 안에는
‘나는 그런 것 살 줄 몰라’ 하면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손가락 하나 까닥하려 하지 않음이 숨어있습니다.
부탁해도 되는 사람 따로 있고,
부탁 받아도 되는 사람 따로 있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자기 손가락은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다른 사람 어깨에 큰 짐을 올려놓는 것이
그저 시장바구니 정도라면 그래도 낫겠는데,
그것이 자기 십자가든, 공동체의 십자가든,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신
그래서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닌지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십자가는 지지 않고
칭찬과 영광만 받으려는 그 날도둑놈의 심보가 있지 않은지
오늘 복음을 통해 들여다보는 오늘입니다.
내안이 훨씬 더 더럽습니다.
네안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