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다음 주가 주님 승천대축일이고 그래서 오늘은 승천을 앞둔,
그러니까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둔 주님과 제자 사이의 얘기이고,
그렇지만 제자들이 주님께 한 얘기는 없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얘기이며 말하자면 유언입니다.
그리고 이 유언에는 부탁도 있고 약속도 있습니다.
먼저 부탁 부분을 보겠는데 부탁이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명령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호소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부탁은 딱 한 가지로 당신의 말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어 집을 지킨다면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출입을 막고,
그럼으로써 물건을 훔쳐 가져가지 못하도록 간수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누가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잘 간수/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누가 빼앗아간다고 하는데 그런 존재가 있습니까?
누가 그런 존재입니까? 사탄입니까?
예, 사탄입니다.
굶주린 주님을 빵으로 유혹한 사탄이 그러니까 주님까지 유혹한 사탄이
더 만만한 우리를 유혹하여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말씀을 빼내가려 합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을 처지에 있을 때 사탄은 주님 말씀보다
자기 말이 낫다며 자기 말을 듣게 하고 주님 말씀은 듣지 않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혹을 받을 처지란 어떤 것이고 무엇이 유혹을 받게 합니까?
제 생각에 유혹을 받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련입니다.
사탄은 시련을 이용하여 유혹을 하고
시련이 우리로 하여금 유혹을 당하게 하고 쉽게 넘어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가 길이나 돌밭에 뿌려졌을 때
악마가 채가거나 환난이나 박해가 닥치면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했기에
이내 말라죽는다고 하셨는데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말씀보다 세상의 말이 더 솔깃할 경우
주님의 말씀은 길바닥에 팽개쳐졌기에 악마가 이내 채갈 것이고
시련의 경우에도 악마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서 흔들어댈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사랑이고 그래서 주님도 “나를 사랑하면”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것만큼 주님 말씀을 꼭 붙잡고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전에 얘기한 적이 있지요.
제가 양성책임을 맡았을 때 형제들을 가끔 흔들어댔습니다.
물론 너무 허약한 경우에는 그러지 않았지만 그 형제가 웬만큼 힘을 지녔다
생각이 될 때 흔들어대는데 그것은 흔들 때 그가 더 꽉 붙잡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붙잡는 힘이고 시련 중에도 주님 말씀을 간직하는 힘입니다.
또한 사랑할 때 주님 말씀이 시련 중의 우리를 붙잡아 주는 힘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중에 있을 때 ‘내가 옆에 있어 줄게.’하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고 또 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이 시련을 견디게 하듯
주님을 사랑한다면 함께 계시겠다는 주님 말씀이 시련을 견디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곧 당신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함께 계셔 주실 거라고 하시고, 성령까지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없고,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를 간직하게 된다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잘 간직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도 간직케 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인간이 기억할 수 있음은 살아있기 때문이고 살아있음은 성령께서
함께 함이라고 알아듣습니다.
기억은 과거라는 시공을 초월해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고
지탱해주는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그래서 좋은 추억을 간직하라고 하고
이 다음에 하느님께 갈 때 가져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추억의 앨범이 아닐까요.
제가 절망과 실의에 빠져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빠져들어 가는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음은 기대와 희망이 담긴 말씀을 기억할 때입니다.
말씀을 떠올릴 수 없다면 절망이라는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어떻게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니 제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기억 할 때 본능으로 흘러가는 제 자신을 다시 고쳐 새우는 기회가 됩니다.
성찬례에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할 때만이 의미 있는 성찬례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가 제대위에 걸려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세월호사건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우리가 그 아픔을 기억할 때만이
다시는 그런 아픈 사건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 일겁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뜻대로 살지 않으시고 절규의 순간에도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순종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뜻대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형태로 이루어짐은 저에게는 아픔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와 제가 원하는 평화는 다를 수밖에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아는 것과 실천은 또 다른 문제이기에 여전히 저에게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잘 간직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도 간직케 되는 것임을 묵상“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저의 믿음 없음에 당신의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아멘.
(<서로>는 <끼리>가 아니다.)
http://www.ofmkorea.org/121826
17년 부활 제6주일
(영의 식별과 성령의 보존을 잘 하려면)
http://www.ofmkorea.org/103925
16년 부활 제6주일
(주님께서 남기신 당부와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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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부활 제6주일
(사랑의 2중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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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부활 제6주일
(상실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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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부활 제6주일
(사랑하는만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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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부활 제6주일
(영원하신 주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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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부활 제6주일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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