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분이시고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가 거듭거듭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고 그래서 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할 수 있고 그래서 하시는 것은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건 남이건 죽이는 것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능력의 한계입니다.
사랑과 미움이 있습니다.
둘 다 관계적 에너지입니다.
사랑도 누군가를 향하여 쏟는 힘이고
미움도 누군가를 향하여 쏟는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이 아무에게도 관심과 신경을 쓰지 않는데 비해
미움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관심이 있다는 표시고
어쩌면 사랑보다도 더 신경을 씁니다.
그렇지만 미움은 어쩌니 저쩌니 해도 사랑의 반대입니다.
이런 표현을 쓰기 싫으면 사랑의 배반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을 했는데도 기대만큼 되돌아오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기에
돌아선 사랑이 미움이니 말입니다.
돌아선 사랑이라면?
사랑과 미움, 둘 다 관계적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인데 비해
미움은 파괴적 에너지입니다.
누구 또는 무엇에 사랑을 쏟았는데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랑은 미움으로 돌아섭니다.
그래서 사랑을 쏟았던 것을 미움으로 파괴합니다.
마치 심혈을 기울여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공이 그 도자기를 깨뜨려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일 때 내 마음 들지 않으면
사랑은 언제든지 미움으로 돌아서고
정성을 기울이던 에너지는 파괴적 에너지로 바뀝니다.
어제는 저와 오랜 인연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결핵 때문에 자활촌인 우양의 집에서 저와 함께 살기도 했고
구산동 산동네에 살며 고생하던 분들이
재건축한 아파트에 새로 입주하게 되어
어제 미사와 집 축복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2-30년 만에 작지만 집을 하나씩 갖게 되니
저도 그렇고 모두 감개무량하기는 한데
그 사이 나이 먹어 이제는 거의 할아버지들이 되었고
본래 얼마 없었지만 그 힘마저도 거의 사그러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략 다음과 같은 취지로 그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다시 같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 날도 얼마 남지 않고,
사랑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옹다옹 지지고 볶고 살 것이냐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 것이냐?
힘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데
그 힘을 생산적으로 쓸 것이냐
파괴적으로 쓸 것이냐?”
우리는 힘이 얼마 없는 유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얼마 없는 힘을 미워하고 파괴하는데 씁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마저도 파괴하고 버립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모퉁이 돌 삼으시는 그 예수님을
우리는 쓰레기, 걸림돌로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수많은 예수님들을 파괴하고 버립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면
전에 파괴하고 버린 이 예수들을
이제는 다시 귀한 모퉁이 돌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분이시고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가 거듭거듭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고 그래서 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할 수 있고 그래서 하시는 것은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건 남이건 죽이는 것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능력의 한계입니다.
사랑과 미움이 있습니다.
둘 다 관계적 에너지입니다.
사랑도 누군가를 향하여 쏟는 힘이고
미움도 누군가를 향하여 쏟는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이 아무에게도 관심과 신경을 쓰지 않는데 비해
미움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관심이 있다는 표시고
어쩌면 사랑보다도 더 신경을 씁니다.
그렇지만 미움은 어쩌니 저쩌니 해도 사랑의 반대입니다.
이런 표현을 쓰기 싫으면 사랑의 배반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을 했는데도 기대만큼 되돌아오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기에
돌아선 사랑이 미움이니 말입니다.
돌아선 사랑이라면?
사랑과 미움, 둘 다 관계적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인데 비해
미움은 파괴적 에너지입니다.
누구 또는 무엇에 사랑을 쏟았는데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랑은 미움으로 돌아섭니다.
그래서 사랑을 쏟았던 것을 미움으로 파괴합니다.
마치 심혈을 기울여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공이 그 도자기를 깨뜨려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일 때 내 마음 들지 않으면
사랑은 언제든지 미움으로 돌아서고
정성을 기울이던 에너지는 파괴적 에너지로 바뀝니다.
어제는 저와 오랜 인연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결핵 때문에 자활촌인 우양의 집에서 저와 함께 살기도 했고
구산동 산동네에 살며 고생하던 분들이
재건축한 아파트에 새로 입주하게 되어
어제 미사와 집 축복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2-30년 만에 작지만 집을 하나씩 갖게 되니
저도 그렇고 모두 감개무량하기는 한데
그 사이 나이 먹어 이제는 거의 할아버지들이 되었고
본래 얼마 없었지만 그 힘마저도 거의 사그러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략 다음과 같은 취지로 그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다시 같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 날도 얼마 남지 않고,
사랑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옹다옹 지지고 볶고 살 것이냐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 것이냐?
힘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데
그 힘을 생산적으로 쓸 것이냐
파괴적으로 쓸 것이냐?”
우리는 힘이 얼마 없는 유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얼마 없는 힘을 미워하고 파괴하는데 씁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마저도 파괴하고 버립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모퉁이 돌 삼으시는 그 예수님을
우리는 쓰레기, 걸림돌로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수많은 예수님들을 파괴하고 버립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면
전에 파괴하고 버린 이 예수들을
이제는 다시 귀한 모퉁이 돌 삼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 합니다.
‘너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속으로 되 뇌이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이건 아니지, 라는 이중의 괴로움을 겪는 생지옥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요.
“우리가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면
전에 파괴하고 버린 이 예수들을
이제는 다시 귀한 모퉁이 돌 삼아야 할 것입니다.“
라는 구절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을 다시 시작 해 보렵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의 모든 허물을 덮는 예수님의 가이없는 사랑을 마음에 품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