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전례적으로 보면 참으로 우연하게도 어제는 연중 16 주일에 마르타의
동생인 마리아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오늘은 또 다른 마리아인 막달라의 마리아 축일을 지냅니다.
둘 다 주님을 사랑하였고 사랑을 받은 분들이지만
살아온 것이 다르듯 사랑의 결도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어제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사랑인데 비해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가신 주님을 시신이라도 찾으려 헤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막달라 마리아의 찾아 헤매는 사랑에 대해 묵상을 했습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찾는다는 것은 그것을 갖고 싶거나 보고 싶어서 찾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는 소유욕의 차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어서 찾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인 것이지요.
어제 우연히 방송을 보다가 금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을 봤는데
그들이 금을 찾기 위해 갖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애를 쓰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묻게 되는 것이 이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애를 쓰는가 하는 것이고,
금이란 것이 이들에게 갖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갖은 애를 쓸 만큼
그리 값진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그까짓 썩어 없어질 황금을 위해 그리 애를 쓰냐고
그들의 찾는 노력과 고생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고
이들은 이런 것을 얻기 위해서도 이렇게 애를 쓰는데
나는 찾기 위해 애쓰는 것이 무엇인지 반성과 성찰을 했으며
그래서 오늘도 주님을 찾아 헤매는 마리아의 사랑에 주목케 된 겁니다.
제가 막달라 마리아처럼 애타게 찾고 있지 않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이미 주님을 찾아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처럼 주님과 함께 있거나
주님이 없어도 애가 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 두 가지가 다 얼마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측면과
없어도 그리 애가 타지 않는 측면이 다 있는 겁니다.
과거 하느님이 안 계시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는 저도
하느님 현존을 그렇게 목말라 했고 그래서 찾기도 하고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였고 또 어떤 때는
늘 함께 계셔주시는 하느님을 옆에 놔두고 그리 찾아 헤맸구나 하는
체험도 하면서 차츰 하느님 찾기를 소홀히 하였던 것 같습니다.
얼마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매일 느끼기도 하고,
그러나 얼마간 하느님 실종 상태인데도 그런 줄 모르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런 때 있지 않습니까?
뭔가 정신없이 하고 있다 보니 옆에 있는 줄 알았던
아기나 치매 노인이 없어진 경우 말입니다.
우리도 종종 그렇게 하느님 실종을 하고
그럼에도 주님이 안 계시다는 말을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듣고 그리고
안 계신 것을 보고도 찾지 않은 사도들처럼 찾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수시로 실종하고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원래 옆에 있어도 보고 싶은 것이기에
한 번 봤으니 됐다며 보는 것을 그치지 않고 계속 보는 것처럼
주님께서 옆에 계셔도 또 보고 싶고 계속 찾아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사도들을 위한 사도)
http://www.ofmkorea.org/107477
16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우리는 사랑을 찾아가는 순례자들)
http://www.ofmkorea.org/91762
15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소망을 열망으로)
http://www.ofmkorea.org/80285
13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지체될 때 더 커지는 열망)
http://www.ofmkorea.org/55175
11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죽음과 부활을 공유하는 사랑)
http://www.ofmkorea.org/5212
10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사랑하지만 떠난다.)
http://www.ofmkorea.org/4230
08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심은)
http://www.ofmkorea.org/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