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계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하시고,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당신 밖에는 하늘에 오른 사람이 없으며
하느님께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사람들을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즉 하느님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행복입니다.
사는 이유 또는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행복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면 되는 것인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렇고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된 행복이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인데도
부자 청년은 혹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비결이 없는지 찾았고
진시왕은 불노초를 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어차피 죽는 것 마음껏 즐기다 죽자는 것,
즉 이 세상 사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 하나이고,
어차피 죽는다면 산다는 것이 허무하고
이 고통스러운 세상 삶을 사는 것이 무의미하니
일찌감치 세상을 하직 하던지 아니면
이 세상을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찾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요즘 동반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인데,
저는 이 사람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요즘처럼 자살 사이트가 있었고
그래서 동반 자살할 수 있었다면 아마 저의 자살이 성공했을 것입니다.
10대의 저는 너무
우울하고,
허무하고,
고독했고.
저의 삶은 무의미하고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 마침 영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극작가인
체스터 톤의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영원한 구원을 주는 우리의 구원자가 없다면
사는 것은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우니
삶과 죽음을 걸고 하느님을 시험하기로 하였습니다.
여섯 발 들어가는 권총에 실탄 다섯 발을 채우고 머리를 쏘는데
하느님이 계시다면 살게 될 것이고
안 계시다면 자기는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살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서 그는 하느님 체험도 하고,
나중에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도 되었습니다.
저도 모방 자살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권총이 없어 연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하였는데
자살도 실패하고 하느님 체험도 실패하였습니다.
둘 다 실패하였지만
존재의 의미와 하느님을 찾는 저의 삶은 계속되었고
그것이 이 수도생활을 하는 계기와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훌륭한 철학자나 인생의 스승 정도가 아니라
나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리스도,
곧 영원한 생명에로 나를 인도하는 구원자라는 믿음은
그로부터 무려 15년이 지나서야 온전히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이제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하시고,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당신 밖에는 하늘에 오른 사람이 없으며
하느님께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사람들을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즉 하느님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행복입니다.
사는 이유 또는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행복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면 되는 것인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렇고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된 행복이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인데도
부자 청년은 혹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비결이 없는지 찾았고
진시왕은 불노초를 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어차피 죽는 것 마음껏 즐기다 죽자는 것,
즉 이 세상 사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 하나이고,
어차피 죽는다면 산다는 것이 허무하고
이 고통스러운 세상 삶을 사는 것이 무의미하니
일찌감치 세상을 하직 하던지 아니면
이 세상을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찾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요즘 동반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인데,
저는 이 사람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요즘처럼 자살 사이트가 있었고
그래서 동반 자살할 수 있었다면 아마 저의 자살이 성공했을 것입니다.
10대의 저는 너무
우울하고,
허무하고,
고독했고.
저의 삶은 무의미하고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 마침 영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극작가인
체스터 톤의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영원한 구원을 주는 우리의 구원자가 없다면
사는 것은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우니
삶과 죽음을 걸고 하느님을 시험하기로 하였습니다.
여섯 발 들어가는 권총에 실탄 다섯 발을 채우고 머리를 쏘는데
하느님이 계시다면 살게 될 것이고
안 계시다면 자기는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살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서 그는 하느님 체험도 하고,
나중에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도 되었습니다.
저도 모방 자살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권총이 없어 연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하였는데
자살도 실패하고 하느님 체험도 실패하였습니다.
둘 다 실패하였지만
존재의 의미와 하느님을 찾는 저의 삶은 계속되었고
그것이 이 수도생활을 하는 계기와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훌륭한 철학자나 인생의 스승 정도가 아니라
나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리스도,
곧 영원한 생명에로 나를 인도하는 구원자라는 믿음은
그로부터 무려 15년이 지나서야 온전히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이제는 믿습니다.
솔직하신 말씀이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저만 헤메는줄 알았습니다.
조명을 거쳐 일치의 길로 나갑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둔밤을 지나 무상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구원의 빛에 평화와 안정을 찾았습니다.
자살의 실패했던 비참했던 날도 다니 태어남도 은총이었습니다.
제가 이러 이러한 이유에서 자신은 아니라고 답했을 때
지인은 "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부르신다"고
저에게 해준 말이 문득 기억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