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어제 우리는 불평하는 우리를 정화해야 함을 봤습니다.
그런데 불평보다 앞서는 것이 불만입니다.
곧 무엇에 대해 누구에게 불만이 있는데 그것이 표출되는 것이 불평이지요.
그런데 불만과 만족은 욕구의 문제이고
만족은 만복, 만선, 만원의 경우와 같이
욕구가 채워졌느냐 덜 채워졌느냐의 문제입니다.
채워지면 만족이고 채워지지 않으면 불만입니다.
그런데 이 욕구란 것이 참으로 묘한 놈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놈이니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어졌다가도 다시 생기는 놈이니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제 우리는 점심을 굶었는데 그 때는 식욕이 대단했었지요.
그러나 저녁을 먹고 나자 그 식욕이란 것이 언제 있었냐는 듯 없어졌는데
욕구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과적인 것, 곧 채우니 없어지는 것이라면
원인적으로도 있다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라고 원하던 바가 이루어지고 나면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처럼 욕구란 바라는 것이 이루어져서 없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되면 원인적으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욕구의 원인제거입니다.
채워지고 난 뒤에 <더 이상>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리고 애초에 <더 이상> 바라는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일생 남편이 더 좋은 남편이기를 바랐는데 안 되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이제 더 이상 바라지 않고 그대로 살기로 합니다. 욕구의 포기이지요.
그런데 이 욕구의 포기가 남편/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경우도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갈망 때문에 또는 하느님 만족 때문에 그리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욕구의 포기는 욕구의 change변화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질그릇>이나 <잔>을 얘기하는데 잔의 change입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 채우려던 잔을 천상 것을 담는 잔으로 바꾸고
쓰레기를 담던 질그릇을 보물을 담는 질그릇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야고보 사도가
이 <잔 바꾸기>의 대표이고 모범입니다.
주님께서 마실 잔을 같이 마시겠다던 말대로 주님과 같은 잔을 마셨습니다.
욕망의 잔을 갈망과 열망의 잔으로 바꾼 것이고,
세상욕망의 잔을 천상갈망의 잔으로 바꾼 것이요,
쾌락의 잔을 수난Passio의 잔으로 바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수난과 수난의 잔을 묵상해봅시다.
수난受難이라는 말은 받아들일 受와 어려울 難,
그러니까 고통과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어려움을 왜 받아들이고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사랑 때문에 받아들이고 사랑의 힘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받아들이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하지요.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빼내어 차지하소서.”
(고배苦杯에서 축배祝杯까지.)
http://www.ofmkorea.org/130367
17년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사랑이 사랑을 담다)
http://www.ofmkorea.org/107894
16년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정화가 필요해!)
http://www.ofmkorea.org/91918
15년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버리는 것도 위대하지만 바치는 것이 더 위대하다)
http://www.ofmkorea.org/80446
13년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주님의 잔)
http://www.ofmkorea.org/55255
12년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해에서 이해로)
http://www.ofmkorea.org/32804
11년 성 야고보 사도 추일
(야고보는 할 수 있을까?)
http://www.ofmkorea.org/5218
09년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십자가의 공동 운반자)
http://www.ofmkorea.org/2882
08년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생명 넘치는 술잔)
http://www.ofmkorea.org/1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