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호수아기는 매우 장엄합니다.
아브라함 선조 때부터 야곱과 모세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시고 해주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펼쳐 보이니 그야말로 장엄한 파노라마입니다.
우리는 진정 이렇게 나와 나의 삶을 거시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나의 삶을 너무 미시적으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너무 당장當場의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당장의 삶이 현재를 충실히 사는 걸 뜻하는 거라면
그 또한 나쁘다 할 수 없겠지만 그런 것이기보다는
당장 닥친 문제들에 급급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지요.
그런데 뒤를 돌아보지도 앞을 내다보지도 않는 당장의 삶,
<여기>에 천국이 없고, <지금>에 영원히 없는 당장의 삶은
신앙인의 삶도 아니고 인간의 삶도 아닌 개돼지의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살면서 하늘 한 번 쳐다보지 않는 삶을 어찌 인간의 삶이라고 하고,
살면서 왜 사는지 묻지 않는 삶을 어찌 인간의 삶이라고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지 않는 삶을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오늘의 내가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누가 어떻게 보살펴줬는지 묻지도 않고
그래서 알지도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의 삶은 삶을 살았어도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가 사람의 삶을 넘어 신앙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더 높고, 더 깊고, 더 넓은 삶의 시야, 그러니까
하느님에게까지 미치는 삶의 시야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인해 내가 살게 되었고,
내가 살지만 하느님에 의해 사는 것임을 볼 줄 아는 시야를 말하는 것인데
오늘 여호수아기는 이것을 장황하게 얘기하며 결론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저절로 된 것도 아니고
우리 힘으로 된 것도 아니며 하느님에 의해 된 것임을 알라는 것인데
이것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이루려는 삶과
얻으려는 삶과
받으려는 삶입니다.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는 삶과
하느님에게서 얻으려고 애쓰는 삶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그저 감사하게 받는 삶이지요.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이 다 하느님에 의해 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당장 당장의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자기 힘으로 이루려 헛심을 쓰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느님께서 어련히 주시는데 괜히 애를 쓰지도 않겠지요.
쉽게 살고,
감사하게 사는 좋은 법을 알라고 호소를 받는 오늘입니다.
(회춘)
http://www.ofmkorea.org/137439
17년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하느님은 중매쟁이)
http://www.ofmkorea.org/109746
16년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하나 되어 살거냐, 홀로 되어 살거냐?)
http://www.ofmkorea.org/92516
15년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허락된 이만 살 수 있는 삶)
http://www.ofmkorea.org/81284
11년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결혼, 셋이 이루는 하나)
http://www.ofmkorea.org/5249
10년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함께 하느님을 이루도록 짝지어 진 존재들)
http://www.ofmkorea.org/4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