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입타는 이민족을 치러 가기 전에 스스로 서원을 했는데
자기가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시면 전쟁에서 돌아올 때
처음 환영하러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환영하러 나온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외동딸입니다.
그래서 이 비극적인 얘기로 인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입타는 이런 서원을 했을까?
자기 딸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서원을 했을까?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 번제물을 원하거나 요구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느님은 번제물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번제물을 바치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번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승리하게 해주지 않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며칠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바라고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원하기는 하느님이나 우리 인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우리 인간도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으로 우리 사랑을 원하시고,
우리 인간은 필요로 하느님 사랑을 원하지요.
우리는 하느님 사랑이 없으면 안 되기에 사랑을 원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사랑이 없으면 안 되기에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해야지만 우리가 구원받고 행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입다나 우리가 서원을 해야 한다면
그것도 서원을 해야 하느님께서 흡족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서원을 해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기에 서원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은 서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오늘 입다의 경우를 보면 자기가 서원을 해야 하느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서원으로 하느님과 자신을 얽어매려한 것인데
하느님은 서원으로 반드시 승리를 주시도록,
입다 자신은 서원으로 반드시 뭔가 희생을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봤듯이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희생을 해야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때에는 합당할 때만 들어주시는데
원하는 것이 합당할 때와 원하는 우리가 합당할 때만 들어주십니다.
원하는 것이 합당할 때란 원하는 것이 선일 때입니다.
원하는 우리가 합당할 때란 우리가 뭘 원하든 사랑으로 원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서원은 우리의 약속이고 사랑의 약속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약속이지만 약속하신 것을
하느님께 강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약속한 것을
우리가 우리에게 스스로 강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담배를 끊으면서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로 강한 사람은 소리 없이 강하고 소리 없이 끊습니다.
큰물은 도도히 흐르지만 얕은 물이 졸졸졸 소리 내며 흐르고,
꽉 찬 깡통은 소리를 내지 않지만 덜 찬 깡통이 소리를 내듯
하느님은 약속을 하실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약속을 해야 하고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약속을 해야 약속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은 서원을 요구치 않으시지만
나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나 스스로 사랑을 약속하는 우리이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아무나'가 아니다.)
http://www.ofmkorea.org/140345
16년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아무나가 아니라 모두 초대 받은 우리)
http://www.ofmkorea.org/92684
15년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흥행에 실패한 혼인잔치)
http://www.ofmkorea.org/81477
12년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나의 혼인예복은?)
http://www.ofmkorea.org/35125
11년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아랑곳 않는 이들과 어울리지 않은 이들)
http://www.ofmkorea.org/5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