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과 관련하여 우리 중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른말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나 사람하고는 가급적이면 좋은 말만 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거나 깨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기에게 불이익이 생길 경우에는 돌변하지요.
그러니까 자기의 불이익과 관련해서만 관여하거나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정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나 사람에게도 뭐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끼어들지 말라 해도 그는 그 사람 때문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 때문에 끼어드는 사람이기에
자기가 생각할 때 옳다고 생각되면 바른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어떻게 보면 이 양 극단의 중간인 사람입니다.
관계를 중시하기에 해야 할 얘기를 못하기도 하고,
사랑의 관계 때문에 다른 사람은 하지 않고
자기도 하기 싫은 얘기를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사랑과 관계를 중시하기에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말을 못하기도 하고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하며,
바른말을 하기보다는 필요한 말을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그에게 필요하면 두려워도 바른말을 하지만
그에게 필요하지도 않고 그와 나의 관계에 도움도 되지 않으면
바른말을 굳이 하려하지 않는데 그것은 사랑의 관계에 이바지하지 않으면
아무리 바른말일지라도 다 불필요한 말이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예언자들의 말은 위 세 가지 중 어떤 부류에 해당될까요?
제 생각에 예언자들의 말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은 그저 바른말이 아니고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이기에
그 말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저도 옛날에 경험한 바가 있고 가끔 신자들에게 듣는 말이
사제가 강론을 하면서 복음을 얘기하지 않고
정치적인 얘기를 한다거나 복음과 상관없는 얘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사제 본인은 물론 자신의 강론이 정치적인 얘기가 아니라 하지요.
사회정의를 위해 바른말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사제는 사회정의를 위해 바른말을 해야 하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거라고 생각되면
자기도 하기 싫고 다른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도 해야 하며,
그럴 때 사회정의를 위한 바른말은 그저 바른말이 아니고 예언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말도 바로 이런 거였지요.
문제는 어떤 때 그것이 하느님의 말이 아니라
사제 자신의 말이라고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복음이나 성경을 가지고 얘기하는데도
예언이 아니라 자기얘기라고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도 사회정의를 복음에 비춰 얘기할 때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느님을 끌어들여 하는 것은 아닌지.
사실 바른말과 예언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내가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사람 또는 예언자라는 의식이 없으면,
그런 정체의식이 없이 얘기하면 예언이 아니라 바른말일 뿐인 거지요.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나와 상관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
-하느님도 없고 사랑도 없고 그저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허망한 죽음이 아니다.)
http://www.ofmkorea.org/141815
17년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의미 있는 죽음을)
http://www.ofmkorea.org/110453
16년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오늘도 헤로디아 같은 사람 많고, 세례자 요한 같은 사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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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진정한 입바른 말의 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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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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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년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마치 샴 쌍둥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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