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생님
남자들 대부분이 요구하는 전부는 존중이다.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권위에 대한 상처로 인해
범죄, 경쟁적 탐욕, 병적인 욕구, 가족 안에서 불안정의 뿌리를 만들어 낸다.
남자임을 증명해야만 했던 불안한 남자들은
내면에 생긴 공허, 그 공백으로 스며드는 악마들로 인하여
관계 맺는 능력이 상실되고
사람들의 감정에 어떻게 공감해야 할지 모른다.
성프란치스코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하느님을 찾게 했으며
하늘의 아버지는 자신을 결코 실망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자신만의 상처가 아니라 세상의 상처요,
고통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어머니인 지구의 고통이며
눈물이 정말로 순화시키는 빗줄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수도자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머니가 항상 나를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될 때마다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사랑은 우리를 영혼과 몸속에 나무가 지탱할 뿌리를 내리게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그 뿌리를 통해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신선한 에너지로 창조를 이루어낸다.
아버지의 에너지가 없으면 실패와 거절을 받아주고
함께 짊어질 누구도 없다는 슬픔에 직면하게 된다.
그 슬픔은 분노의 표현이다.
남자들이 느끼는 분노는 실제로는 감추어진 슬픔이다.
끝나지 않은 상처로 고통받는 남자들,
상실과 공허의 죽음을 겪는 남자들,
심각한 신경증과 우울증, 자포자기와 여러 형태의 중독,
심지어 자살 충동과 같은 고통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고래 뱃속에서 사흘을 보냈던 요나는
자신의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떻게 그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거기서 기다리는 것을 배웠다.
고래 뱃속은 그에게 위대한 교육 공간이었다.
마침내 그는 가기 싫은 곳으로 안내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멸망하기를 원했던 마음을 거두고 회개를 선포하였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시다.
당신의 상처가 당신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게 하라,
거기서 배우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