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손님 대접을 할 때 제가 거의 매번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 형제 중에 접대의 황제 형제는 손님이 오시면
손님에게 갖가지 차와 과자 등을 내놓고
손님이 미안해 할 정도로 극진하게 대접을 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내놓지 않다가 얘기가 끝나갈 즈음에야
내가 아무 것도 내놓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주전부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같이 술을 한 잔 하는데
술은 못하는 사람 옆에 앉으면 따라줄 줄을 모릅니다.
저를 무시하거나 배려의 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정말 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말씀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술대접을 바라니 술대접을 잘 하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기 바라는 것처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가 좋아하리라고
나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그리고 그를 위한답시고 그것을 그에게 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다른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위하는 마음만 믿고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정말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정말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정말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압니다.
사랑의 순수성만큼,
사랑의 정도만큼 그것을 압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아야 하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 하여도
상대가 그 가치를 모르고 그래서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주지 말아야 합니다.
짓밟거나
심지어는 싫다는데도 왜 주냐고 시비 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어떤 신앙 집단에서 전단을 나눠주곤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기에 나눠주는데
사람들은 보지도 않고 그것을 그냥 쓰레기통이나 길바닥에 버립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의 좋은 마음과 애씀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마음 아프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 쓰레기가 되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나하고 관련이 없는 전단일지라도
심지어 제가 싫어하는 종파의 전단일지라도 꼭 받습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안 하고는 내 몫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수고에 보람을 주지도 못해도
적어도 그들의 수고를 제가 짓밟지 않기 위해서 그러합니다.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물을 주어도 그 보물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셔도 그것이 은총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손님 대접을 할 때 제가 거의 매번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 형제 중에 접대의 황제 형제는 손님이 오시면
손님에게 갖가지 차와 과자 등을 내놓고
손님이 미안해 할 정도로 극진하게 대접을 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내놓지 않다가 얘기가 끝나갈 즈음에야
내가 아무 것도 내놓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주전부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같이 술을 한 잔 하는데
술은 못하는 사람 옆에 앉으면 따라줄 줄을 모릅니다.
저를 무시하거나 배려의 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정말 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말씀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술대접을 바라니 술대접을 잘 하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기 바라는 것처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가 좋아하리라고
나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그리고 그를 위한답시고 그것을 그에게 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다른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위하는 마음만 믿고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정말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정말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정말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압니다.
사랑의 순수성만큼,
사랑의 정도만큼 그것을 압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아야 하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 하여도
상대가 그 가치를 모르고 그래서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주지 말아야 합니다.
짓밟거나
심지어는 싫다는데도 왜 주냐고 시비 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어떤 신앙 집단에서 전단을 나눠주곤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기에 나눠주는데
사람들은 보지도 않고 그것을 그냥 쓰레기통이나 길바닥에 버립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의 좋은 마음과 애씀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마음 아프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 쓰레기가 되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나하고 관련이 없는 전단일지라도
심지어 제가 싫어하는 종파의 전단일지라도 꼭 받습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안 하고는 내 몫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수고에 보람을 주지도 못해도
적어도 그들의 수고를 제가 짓밟지 않기 위해서 그러합니다.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물을 주어도 그 보물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셔도 그것이 은총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한한 존재로서 시간은 곧 생명이라면,
너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은
내 생명을 담보로 너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각오와 희생이 전제되는 까닭에
하느님의 심금을 울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부족한 나를 위한 너의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조건이 동일한 너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제 식대로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천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도
몸으로 체득하면서 결코 아는 것이 힘이되지 못하는
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