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를 빕니다.
저를 처음 보시죠?
저도 여러분을 처음 뵙니다.
저는 작은 형제회 김 찬선 신부입니다.
새 신부님의 원장 신부라고 간단히 소개 올리겠습니다.
이 용호 프란치스코 새 신부님의 첫 미사를 통하여
상평동 본당 신부님과 모든 신자 여러분과 처음 만나게 되어 기쁘고
이렇게 첫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부님과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이 말은 정말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 새 신부님은 불쌍한 신부입니다.
지금 고아입니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세례를 받으시고 이 본당에 적을 두셨지만 곧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얼마 전 돌아가시어 내일 49재를 지내십니다.
어제 사제 수품 미사 후 축학식 때
우리 새 신부님은 부모님 대신 큰 누나와 자형이 나왔는데
저는 돌아가시기 직전 세례드릴 때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그때 제가 어머니께 조금만 더 기운을 차려서 아들 사제로 서품되는 것
꼭 보고 돌아가시라고 했는데 그걸 못보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새 신부님은 육신의 부모만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수도원에 보내 준 아버지 신부도 없습니다.
보통 첫 미사 강론은 아버지 신부가 하는 것인데
새 신부님은 아버지 신부가 없어서 제가 대신 하게 되었습니다.
새 신부님에게 아버지 신부가 없는 이유는
새 신부님이 뜨내기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창녕에서 출생하여 진교에서 어린 시절 보내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곳 상평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지만
부모님이 모두 신자가 아니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영세 후 이곳에 교적을 두셨다는 것 외에는
이곳 상평과 아무런 신앙적 인연이 없습니다.
새 신부님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서울로 유학을 와서
서울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부터입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를 세례명으로 가진 선배 누나가 있었는데
프란치스카라는 여자 세례명을 가지라는 신부님의 제의에도
자기는 죽어도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할 정도로 프란치스코를 사랑하여
후배인 새 신부님에게도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추천하였답니다.
20살에 서울 명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명동 성당은 전국의 뜨내기 신자들이 세례를 받고 적을 두는 곳입니다.
그래서 새 신부님은 출신 본당도 없고 아버지 신부도 없는 것이지요.
아무튼 프란치스코로 세례를 받은 덕분에
유럽 배낭여행을 할 때 아시시에 들려 프란치스코 성지들을 순례하였고
이 때 성인의 삶에서 큰 감명을 받아
프란치스칸 수도자로서의 성소를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프란치스코 세례명의 누나를 만난 것과
프란치스코를 세례명으로 갖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고
하느님 부르심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과 군복무, 그리고 대학원까지 마친 새 신부님은
2000년 대 희년에 석사학위 취득과 함께 수도원 입회를 합니다.
좋은 대학 나와 출세가 보장된 자식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는데,
신자도 아닌 부모가 반대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이 부모 모두 반대하셨지만
특히 어머니께서 미신을 믿으셨기 때문인지 더 반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르심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미신을 열심히 믿으셨기에 어머니께서 아주 심하게 반대를 하셨지만
그 미신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반대를 해도 새 신부님이 뜻을 꺾지 않으니
어머니께서 무당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무당이 들어가는 것 반대하지 마라.
3년 있다가 나올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 만만하게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무당도 하느님 부르심의 도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3년이 되어도 아들이 수도원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어머니는 수도원을 찾아가 왜 3년이 되어도 안 나오냐고
성화를 하시며 데리고 나가려고 하셨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도 아들의 수도생활을 반대하셨지만
위암을 계기로 세례를 받으시고
이곳에 교적을 두시고 이곳에 묻혔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아들의 수도생활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마저 암에 걸리셨고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반대와 이런 상황에서도
새 신부님은 2007년 종신서원을 받았고
2008년, 작년 부제품을 받고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올 해 슬프지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어머니는 세례를 받을 마음이 조금 생긴 것입니다.
새 신부님이 미국에서 저에게 어머니가 세례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한 번 찾아뵈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원목 신부 수녀님의 도움을 받아 세례를 준비하였고
새 신부님이 서품을 받기 위해 들어와 곧 바로 세례를 드렸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비록 아들이 신부가 되는 것을 보지는 못하셨지만
아들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평안히 돌아가셨고 이곳에 묻히셨습니다.
내일 새 신부님의 가족들은 어머니 49재를 지내고
아버지 옆에 합장할 계획입니다.
저는 새 신부님의 성소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도자, 성직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저는 새 신부님 또래의 조카들을 여럿 두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신부 만들려고 공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데 괘씸하게도 한 놈도 수도자, 성직자 된 놈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복사도 하고 신부되겠다고 하고는 다 장가들었습니다.
그런데 새 신부님은 세례도 혼자 받고
수도 성소도 반대를 무릅쓰고 혼자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구의 이끄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하고
그 부르심과 이끄심에 새 신부님은 흔들림 없이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런 묵상을 합니다.
어머니가 반대하셨지만 사실은 이 길을 가게 하셨다.
그것도 흔들림 없이 그리고 큰 열망을 가지고 가게 하셨다.
도 종환 시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흔들림이 없기 위해서는 많이 흔들려봐야 합니다.
어머니의 흔드심이 새 신부님의 흔들림 없는 신앙의 뿌리입니다.
어머니의 흔드심이 새 신부님의 흔들림 없는 성소응답의 근거입니다.
열망도 그러합니다.
무릇 열망이란 반대를 먹고 크는 법입니다.
작은 열망은 작은 반대에도 사그러들겠지만
큰 열망은 오히려 반대에 비례하여 커지는 법입니다.
아무쪼록 새 신부님께서 인간적으로는 슬프지만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 부르심을 열정적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라고
여러분 모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새 신부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고향 여러분들이 새 신부님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되어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새 신부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거듭,
이렇게 작은 근거에도 불구하고
새 신부님의 사제 서품을 축하해주시고
이렇게 성대하게 첫 미사를 할 수 있게 해주신
본당 신부님과 사목 위원들,
그리고 신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저를 처음 보시죠?
저도 여러분을 처음 뵙니다.
저는 작은 형제회 김 찬선 신부입니다.
새 신부님의 원장 신부라고 간단히 소개 올리겠습니다.
이 용호 프란치스코 새 신부님의 첫 미사를 통하여
상평동 본당 신부님과 모든 신자 여러분과 처음 만나게 되어 기쁘고
이렇게 첫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부님과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이 말은 정말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 새 신부님은 불쌍한 신부입니다.
지금 고아입니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세례를 받으시고 이 본당에 적을 두셨지만 곧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얼마 전 돌아가시어 내일 49재를 지내십니다.
어제 사제 수품 미사 후 축학식 때
우리 새 신부님은 부모님 대신 큰 누나와 자형이 나왔는데
저는 돌아가시기 직전 세례드릴 때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그때 제가 어머니께 조금만 더 기운을 차려서 아들 사제로 서품되는 것
꼭 보고 돌아가시라고 했는데 그걸 못보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새 신부님은 육신의 부모만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수도원에 보내 준 아버지 신부도 없습니다.
보통 첫 미사 강론은 아버지 신부가 하는 것인데
새 신부님은 아버지 신부가 없어서 제가 대신 하게 되었습니다.
새 신부님에게 아버지 신부가 없는 이유는
새 신부님이 뜨내기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창녕에서 출생하여 진교에서 어린 시절 보내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곳 상평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지만
부모님이 모두 신자가 아니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영세 후 이곳에 교적을 두셨다는 것 외에는
이곳 상평과 아무런 신앙적 인연이 없습니다.
새 신부님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서울로 유학을 와서
서울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부터입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를 세례명으로 가진 선배 누나가 있었는데
프란치스카라는 여자 세례명을 가지라는 신부님의 제의에도
자기는 죽어도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할 정도로 프란치스코를 사랑하여
후배인 새 신부님에게도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추천하였답니다.
20살에 서울 명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명동 성당은 전국의 뜨내기 신자들이 세례를 받고 적을 두는 곳입니다.
그래서 새 신부님은 출신 본당도 없고 아버지 신부도 없는 것이지요.
아무튼 프란치스코로 세례를 받은 덕분에
유럽 배낭여행을 할 때 아시시에 들려 프란치스코 성지들을 순례하였고
이 때 성인의 삶에서 큰 감명을 받아
프란치스칸 수도자로서의 성소를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프란치스코 세례명의 누나를 만난 것과
프란치스코를 세례명으로 갖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고
하느님 부르심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과 군복무, 그리고 대학원까지 마친 새 신부님은
2000년 대 희년에 석사학위 취득과 함께 수도원 입회를 합니다.
좋은 대학 나와 출세가 보장된 자식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는데,
신자도 아닌 부모가 반대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이 부모 모두 반대하셨지만
특히 어머니께서 미신을 믿으셨기 때문인지 더 반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르심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미신을 열심히 믿으셨기에 어머니께서 아주 심하게 반대를 하셨지만
그 미신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반대를 해도 새 신부님이 뜻을 꺾지 않으니
어머니께서 무당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무당이 들어가는 것 반대하지 마라.
3년 있다가 나올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 만만하게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무당도 하느님 부르심의 도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3년이 되어도 아들이 수도원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어머니는 수도원을 찾아가 왜 3년이 되어도 안 나오냐고
성화를 하시며 데리고 나가려고 하셨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도 아들의 수도생활을 반대하셨지만
위암을 계기로 세례를 받으시고
이곳에 교적을 두시고 이곳에 묻혔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아들의 수도생활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마저 암에 걸리셨고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반대와 이런 상황에서도
새 신부님은 2007년 종신서원을 받았고
2008년, 작년 부제품을 받고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올 해 슬프지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어머니는 세례를 받을 마음이 조금 생긴 것입니다.
새 신부님이 미국에서 저에게 어머니가 세례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한 번 찾아뵈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원목 신부 수녀님의 도움을 받아 세례를 준비하였고
새 신부님이 서품을 받기 위해 들어와 곧 바로 세례를 드렸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비록 아들이 신부가 되는 것을 보지는 못하셨지만
아들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평안히 돌아가셨고 이곳에 묻히셨습니다.
내일 새 신부님의 가족들은 어머니 49재를 지내고
아버지 옆에 합장할 계획입니다.
저는 새 신부님의 성소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도자, 성직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저는 새 신부님 또래의 조카들을 여럿 두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신부 만들려고 공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데 괘씸하게도 한 놈도 수도자, 성직자 된 놈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복사도 하고 신부되겠다고 하고는 다 장가들었습니다.
그런데 새 신부님은 세례도 혼자 받고
수도 성소도 반대를 무릅쓰고 혼자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구의 이끄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하고
그 부르심과 이끄심에 새 신부님은 흔들림 없이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런 묵상을 합니다.
어머니가 반대하셨지만 사실은 이 길을 가게 하셨다.
그것도 흔들림 없이 그리고 큰 열망을 가지고 가게 하셨다.
도 종환 시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흔들림이 없기 위해서는 많이 흔들려봐야 합니다.
어머니의 흔드심이 새 신부님의 흔들림 없는 신앙의 뿌리입니다.
어머니의 흔드심이 새 신부님의 흔들림 없는 성소응답의 근거입니다.
열망도 그러합니다.
무릇 열망이란 반대를 먹고 크는 법입니다.
작은 열망은 작은 반대에도 사그러들겠지만
큰 열망은 오히려 반대에 비례하여 커지는 법입니다.
아무쪼록 새 신부님께서 인간적으로는 슬프지만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 부르심을 열정적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라고
여러분 모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새 신부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고향 여러분들이 새 신부님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되어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새 신부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거듭,
이렇게 작은 근거에도 불구하고
새 신부님의 사제 서품을 축하해주시고
이렇게 성대하게 첫 미사를 할 수 있게 해주신
본당 신부님과 사목 위원들,
그리고 신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당연히 이용호 수사님은 연세가 많으시겠고 어머님도 구교신자이시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외인 가정에서 나신 귀하신 사제님이셨네요.
외인 가정에서 사제, 더구나 프란치스칸 사제가 나시기가 어디 그리 쉽던가요?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네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은 그야말로 하늘나라의 신비지요.
미국 동부에서 공부하신다고 들었는데
혹 이곳 미 서부의 Los Angeles에 오시면 꼭 뵙고 싶습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사제로 행복하게 살아가시도록
매일 기도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함께 서품 받으신 네분 신부님과 부제님들도 함께요..
새 신부님의 감동적인 성소 배경과 당쇠신부님과 여러 형제들의
뜨거운 사랑이 보는 이의 마음에 더없는 감격이 됩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더 높이 날아 오르시며, 그 빛 속에
더욱 강하고 든든하게 뿌리내리는 나날되시기를 기도드려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흔들림 없이" 따르신
이용호 프란치스코 새 신부님께 감사 드립니다.
침묵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시어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참된 사랑은 '내가' 없어지고 하느님 만이 계시는 것이라고...
부족 하지만 주님의 도구로 '나' 를 내어 놓습니다.
흘들리는 꽃처럼...
관심과 사랑이 당연히 피어나야하는 것을...
좋은 살아있는 말씀 감사합니다.
그 동안의 형제적 관심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축하드리오며 재물과 욕망의 끝없는 목마름에 허덕이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참희망이 되어 주십사 기도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