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 사도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나는 믿을 수 없고
그래서 믿지 않겠다는 뜻일까?
오늘 복음을 몇 차례 거듭 씹고 또 씹으니
이 말씀은 믿을 수 없고, 믿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믿고 싶다는 뜻으로 읽혀졌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부활을 향유하는데
자기만 그 대열에서 제외되고 소외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자신의 그런 처지가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만 없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에 대해
예수님께 서운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10대, 20대 때 저도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
그중에서도 성인들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소외감, 안타까운 마음에 괴로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약이 오르면서 오기도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꼭 한 번 하느님을 만나야겠다.”
토마 사도가 눈으로 직접 보고
손가락으로 상처에 넣어봐야겠다는 것도
이와 같은 심사가 아니었을까요?
복음에 보면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나옵니다.
토마 사도가 있을 때 나타나시고
나타나셔서 이내 토마 사도를 향하시는 것을 볼 때
토마 사도를 위해 일부러 또 나타나신 것이 분명합니다.
토마 사도에 대한 배려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친절하신가요?
저의 경우에는 약이 올라 하느님 체험을 하려고 기를 쓰면 쓸수록
하느님은 오히려 더 저만치 멀어지시고,
그러다가
저의 시도가 다 실패로 돌아갔을 때 하느님이 나타나시던데....
그것도 시일이 한참 지난 뒤에 나타나시던데
토마 사도에게는 여드레 만에 그렇게 쉽게 나타내 보이시다니....
그러나 이 여드레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애타는 사람에게는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드레는 열망이 은총을 만나기 위한 시간이었고
은총이 숙성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는 너무도 감읍하여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은
오래 생각한 신학적 토로가 아니라
은총이 선사한 신앙의 토로입니다.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 사도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나는 믿을 수 없고
그래서 믿지 않겠다는 뜻일까?
오늘 복음을 몇 차례 거듭 씹고 또 씹으니
이 말씀은 믿을 수 없고, 믿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믿고 싶다는 뜻으로 읽혀졌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부활을 향유하는데
자기만 그 대열에서 제외되고 소외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자신의 그런 처지가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만 없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에 대해
예수님께 서운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10대, 20대 때 저도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
그중에서도 성인들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소외감, 안타까운 마음에 괴로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약이 오르면서 오기도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꼭 한 번 하느님을 만나야겠다.”
토마 사도가 눈으로 직접 보고
손가락으로 상처에 넣어봐야겠다는 것도
이와 같은 심사가 아니었을까요?
복음에 보면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나옵니다.
토마 사도가 있을 때 나타나시고
나타나셔서 이내 토마 사도를 향하시는 것을 볼 때
토마 사도를 위해 일부러 또 나타나신 것이 분명합니다.
토마 사도에 대한 배려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친절하신가요?
저의 경우에는 약이 올라 하느님 체험을 하려고 기를 쓰면 쓸수록
하느님은 오히려 더 저만치 멀어지시고,
그러다가
저의 시도가 다 실패로 돌아갔을 때 하느님이 나타나시던데....
그것도 시일이 한참 지난 뒤에 나타나시던데
토마 사도에게는 여드레 만에 그렇게 쉽게 나타내 보이시다니....
그러나 이 여드레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애타는 사람에게는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드레는 열망이 은총을 만나기 위한 시간이었고
은총이 숙성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는 너무도 감읍하여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은
오래 생각한 신학적 토로가 아니라
은총이 선사한 신앙의 토로입니다.
묵상을 못하신 것이 아니라 글을 올리기 어려운 상황으로 짐작했지요.
죽어있는 듯 느껴져 저라도 올릴까, 라는 주제넘은 생각을 잠시 했답니다.
제가 이렇게 교만합니다. ㅎㅎㅎㅎㅎ
이제야 게시판이 다시 살아 숨쉬고 있네요
고맙습니다.
사도 토마의 마음으로 본 오늘의 복음 묵상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생각한 신학적 토로가 아니라
은총이 선사한 신앙의 토로입니다........
주님, 뵙지않고 믿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아멘
불완전이야말로 은혜의 선결조건임을 깨닫는다.
빛은 갈라진 틈으로만 새어든다.
은혜는 상처의 갈라진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빛이다"
필립 얀시의 <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 >책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해하는 심정으로 털어내는
그의 말을 들으며 가슴 저리던 감동이 기억납니다.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은혜를 나눠주시는
사랑의 전달자 되신 신부님께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