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한 인생들, 저는 감히 주교 각하께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드리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각하께 간절히 바라건대,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김 대건 신부님의 23번째 서한의 내용입니다.
주님께 가는 마지막 길에 어머니를 주교님께 부탁하는 내용이
마치 예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것 같습니다.
성 김 대건 신부님과 어머니 우르술라의 사연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사연 못지않게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어머니 우르술라는 1798년 태어나 1864년 한 많은 생을 마쳤는데
김 씨 집안으로 시집 온 때부터 기구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1830년 시아버지 김 택현이 신앙 때문에 죽고
1836년 열 다섯 어린 나이의 아들은 기약 없이 중국으로 떠나고
1839년 기해박해 때 남편 김 제준이 붙잡혀 참수형을 당하고
남은 가족은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야말로 신앙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것이 사위의 밀고 때문입니다.
남편의 죽음, 쫓기는 삶도 너무도 고통스러웠겠지만
이 모든 고통을 안겨 준 사위로 인한 마음고생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고통은
이 모든 고통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고통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삶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에게 우환과 환난이 닥치는 경웁니다.
그중에서도 미신을 믿다가 신앙을 가진 경우,
하느님을 믿어서 오히려 불행하게 됐다고 신앙이 흔들립니다.
복을 받으려고 하느님을 믿었는데
하느님을 믿어 오히려 불행해진다면 신앙이 흔들리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축복을 예비하지 않고 오히려 가혹한 시련을 예비하십니다.
저도 이런 면에서 예외는 아니었고
저의 수도원 다른 형제들도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중요한 길목마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늘그막에 얻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것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것처럼
하느님은 참으로 가혹한 하느님이십니다.
이때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까지 하느님을 믿어야 하나?
이렇게까지 당신을 선택하기를 하느님은 바라시나?
자기 가족을 다 잃고 당신을 얻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도 사위의 밀고로 가족이 깨지는 고통을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꼭 그렇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시나?
이 무슨 악취미인가?
하느님은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꼴을 못 보시고 꼭 벌을 주시는 분인가?
주님께서도 전혀 아니라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당신께 오는 사람에게 가족 이별과 가족 해체의 고통을 주심은
악취미 때문에도 아니고 벌도 아닙니다.
죽기 전에 정 떼기를 하듯 정을 떼라는 것이고
당신 이외의 사람은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움은 미움이로되 하느님을 사랑하는 미움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니라면 내 가족을 미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가족을 미워하며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안타깝게도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하느님보다 내 가족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내 가족에게 복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내 가족에게 복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가족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 가족 때문에 사랑하고 내 가족 때문에 미워하는 분이라면
그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하느님이고 나의 주님이라면
하느님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가족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께 가고 늦게 하느님께 가는 사람이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께 가고 언제고 하느님께 가며,
그리고 죽을 때 다 두고 가듯이
하느님께 가는 사람은 누구나 가족과 이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먼저 그리고 앞서 하느님께 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그리고 다른 사람 보기에 가혹하게 가족과 이별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과 성모 마리아에게
가장 가혹한 가족 이별을 하도록 하셨고
성 김 대건 사제와 어머니에게 그러하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으며
신앙에 있어서 앞서 간 사람들은 이것을 굳게 믿고
이를 앙 물고 주님을 따라 간 사람들입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드리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각하께 간절히 바라건대,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김 대건 신부님의 23번째 서한의 내용입니다.
주님께 가는 마지막 길에 어머니를 주교님께 부탁하는 내용이
마치 예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것 같습니다.
성 김 대건 신부님과 어머니 우르술라의 사연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사연 못지않게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어머니 우르술라는 1798년 태어나 1864년 한 많은 생을 마쳤는데
김 씨 집안으로 시집 온 때부터 기구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1830년 시아버지 김 택현이 신앙 때문에 죽고
1836년 열 다섯 어린 나이의 아들은 기약 없이 중국으로 떠나고
1839년 기해박해 때 남편 김 제준이 붙잡혀 참수형을 당하고
남은 가족은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야말로 신앙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것이 사위의 밀고 때문입니다.
남편의 죽음, 쫓기는 삶도 너무도 고통스러웠겠지만
이 모든 고통을 안겨 준 사위로 인한 마음고생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고통은
이 모든 고통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고통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삶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에게 우환과 환난이 닥치는 경웁니다.
그중에서도 미신을 믿다가 신앙을 가진 경우,
하느님을 믿어서 오히려 불행하게 됐다고 신앙이 흔들립니다.
복을 받으려고 하느님을 믿었는데
하느님을 믿어 오히려 불행해진다면 신앙이 흔들리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축복을 예비하지 않고 오히려 가혹한 시련을 예비하십니다.
저도 이런 면에서 예외는 아니었고
저의 수도원 다른 형제들도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중요한 길목마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늘그막에 얻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것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것처럼
하느님은 참으로 가혹한 하느님이십니다.
이때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까지 하느님을 믿어야 하나?
이렇게까지 당신을 선택하기를 하느님은 바라시나?
자기 가족을 다 잃고 당신을 얻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도 사위의 밀고로 가족이 깨지는 고통을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꼭 그렇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시나?
이 무슨 악취미인가?
하느님은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꼴을 못 보시고 꼭 벌을 주시는 분인가?
주님께서도 전혀 아니라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당신께 오는 사람에게 가족 이별과 가족 해체의 고통을 주심은
악취미 때문에도 아니고 벌도 아닙니다.
죽기 전에 정 떼기를 하듯 정을 떼라는 것이고
당신 이외의 사람은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움은 미움이로되 하느님을 사랑하는 미움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니라면 내 가족을 미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가족을 미워하며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안타깝게도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하느님보다 내 가족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내 가족에게 복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내 가족에게 복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가족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 가족 때문에 사랑하고 내 가족 때문에 미워하는 분이라면
그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하느님이고 나의 주님이라면
하느님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가족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께 가고 늦게 하느님께 가는 사람이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께 가고 언제고 하느님께 가며,
그리고 죽을 때 다 두고 가듯이
하느님께 가는 사람은 누구나 가족과 이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먼저 그리고 앞서 하느님께 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그리고 다른 사람 보기에 가혹하게 가족과 이별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과 성모 마리아에게
가장 가혹한 가족 이별을 하도록 하셨고
성 김 대건 사제와 어머니에게 그러하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으며
신앙에 있어서 앞서 간 사람들은 이것을 굳게 믿고
이를 앙 물고 주님을 따라 간 사람들입니다.
이 지상의 삶을
미련 없이 버려야 겠습니다.
너무도 인간적인 것에 얽매여 사는 우리 신앙인에겐
참으로 고통스런,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위의 말씀과 같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고통과 요구를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런 아픔이 하느님께서
고통을 의도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일것입니다.
혈육의 정을 뛰어넘는 사람은 그같은 고통을 받을 때
하느님안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며 하느님께서
그 고통에 함께 계심을 아는 사람이기에
이같은 경계선을 넘어사는 103위 성인과 욥과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성인들과 욥의 몫이고
나의 몫은 아닌 것이니
참으로 그것이 나의 몫이기 위해서
나도 그 몫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