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오늘 루카 복음 사가의 축일을 맞아 다른 복음과 한 번 비교를 해봤는데
요한복음은 매우 신비적이고, 마르코복음은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며,
마태오복음이 보수적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루카복음은 진보적이고
따듯하다는 특히 각계각층의 가난한 이들에게 따듯하다는 느낌이 있으며
그래서 복음 중에서도 복음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왜냐면 복음이란 기쁜 소식인데 특히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장 잘 그리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복음이 루카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은 주님의 공생활을 이사야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 없는 일흔 두 제자 파견 얘기에서도
자유롭고 자유를 주는 복음 선포가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열두 사도의 파견이나 일흔두 제자의 파견 모두 머물고 떠남에 있어서
어디에도 매이지 말 것을 얘기하지만 일흔두 제자의 파견에는
열두 사도의 파견에는 없는 ‘길에서 인사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에 있어서 인사는 기본일 듯한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복음 선포의 시급성 때문에 인사하기 위한 지체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이런 뜻이 없지 않고 이것이 중요한 의미이지만 다른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일에 인사를 중요시 여기지 말고,
그래서 시간도 그런 하찮은 일에 허비하지 말라는 뜻 말입니다.
인사란 한자어로 人事이고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인사를 깎아 말하면 인사치레에 불과한 것이고,
길에서 인사하지 말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
인사치레나 인간사에 얽매이지 말고 거침없이 나아가라는 뜻이 됩니다.
인간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는 인사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지만
매이지는 말아야 하는데 사실 이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양극단의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면서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를 소홀히 하고
심지어 인간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수도자나 사제들에게서 볼 수 있고 저도 그런 잘못을 자주 범합니다.
반대의 잘못도 자주 범합니다.
꽤 오랫동안 저는 선교를 강조하고 선교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저의 이 선교중시가 과연 사명감 때문인지
인간적인 집착 때문인지 자주 고민도 하고 반성케 됩니다.
그것은 아마 제가 사명감과 집착을 오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작은 사명감에서 하는데 어느새 그 일을 나의 일로 삼고 있고,
시작은 사랑으로 하는데 어느새 인간 애착을 하곤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복음선포가 사명감인지 집착인지,
사랑인지 애착인지는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유입니다.
언제든지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날 정도로 자신도 자유로워야 하고,
나의 복음선포와 사랑에 응답/열매가 있기를 요구하지 않는 겁니다.
나는 어떤 복음선포를 하는지 돌아보게 되는 루카사도의 축일입니다.
(허투루 받지 마라!)
http://www.ofmkorea.org/158224
17년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나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나?)
http://www.ofmkorea.org/112444
16년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내가 바로 그 다른 제자!)
http://www.ofmkorea.org/94637
12년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떠남과 머무름)
http://www.ofmkorea.org/42421
10년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천개의 호수에 하나의 달이)
http://www.ofmkorea.org/4489
08년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도반의 행복)
http://www.ofmkorea.org/1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