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인 것 같습니다.
가능성은 미래에 대한 개방성일 것입니다.
현재로 모든 것을 종결짓지 않고
다 끝난 것 같지만 뭔지 모를 무엇이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회당장의 믿음은 이런 면에서 대단합니다.
자기 딸이 죽었는데도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인간의 범주에서 보면 끝났다고 종결짓고
죽음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주님을 믿기에 끝났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대단합니다.
회당장의 믿음에 걸맞게 예수님은 죽음을 잠 정도로 생각하십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말을 비웃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정도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일 것은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추루하지 않고
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지금의 북한 문제에 대해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남과 북의 태도를 볼 때 평양의 평화 봉사소는 끝난 것이 아닐까?
평화 봉사소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은 집착에 불과하고
그야말로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지금까지의 경험과 오늘의 복음을 생각하면
저는 담담해지면서 아무도 알지 못할 하느님의 해법을 기다립니다.
지금까지 몇 차례 끝장이 날 것 같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주님은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보지 않고 인간의 한계만을 보며
서둘러 현 상황을 부정적으로 종결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기에선 주님께서도 아무 것 하실 수 없습니다.
가능성은 미래에 대한 개방성일 것입니다.
현재로 모든 것을 종결짓지 않고
다 끝난 것 같지만 뭔지 모를 무엇이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회당장의 믿음은 이런 면에서 대단합니다.
자기 딸이 죽었는데도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인간의 범주에서 보면 끝났다고 종결짓고
죽음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주님을 믿기에 끝났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대단합니다.
회당장의 믿음에 걸맞게 예수님은 죽음을 잠 정도로 생각하십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말을 비웃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정도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일 것은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추루하지 않고
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지금의 북한 문제에 대해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남과 북의 태도를 볼 때 평양의 평화 봉사소는 끝난 것이 아닐까?
평화 봉사소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은 집착에 불과하고
그야말로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지금까지의 경험과 오늘의 복음을 생각하면
저는 담담해지면서 아무도 알지 못할 하느님의 해법을 기다립니다.
지금까지 몇 차례 끝장이 날 것 같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주님은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보지 않고 인간의 한계만을 보며
서둘러 현 상황을 부정적으로 종결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기에선 주님께서도 아무 것 하실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 한단계 넘어선다면
아니 비록 우리 눈으로
되어져 가는 일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원망이나 실망으로 낙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시작해 볼뿐
만사를 이루어 가는 것은 그분이시니
일이 되어져 가는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어떤 일이 되었든
내가 하는, 나로 인한 일은 없는 것인데
많은 경우 우리들이,
우리들로 말미암아
무슨 일을
이루어간다고 생각하니
인간의 마음이 앞서게 되고
그래서 일을 그르치는 것 아닐까 합니다.
모든 일의 뒤에 숨어져 보이지 않는
되어져 가는 그 자체를 바라보고저 합니다.
주님께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시고자 만 하시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시니...
기다림은(인내) 하느님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