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and Doing.
존재와 활동.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고 무엇이든 한다.
어떤 존재이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나?
존재와 활동에 따라 밑에서부터 등급을 매긴다면,
무위도식에 외톨이,
외톨이에 일벌레,
무위도식에 한량,
열심히 일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순이 아닐까?
열심히 일하고 더불어 사는 것,
이것이 인간적으로 잘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신앙의 차원에서는 이것으로 부족할 것입니다.
존재든 활동이든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빠져있지요.
신앙인이라면 존재와 활동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셔야지요.
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있는 존재와
늘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하라시는 것을 하는 존재이어야지요.
요즘, 아니 오래 전서부터 수도생활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것으로
과도한 활동주의 또는 일중독이 자주 거론됩니다.
존재의 정체성을 잃고 그저 일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도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일이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마치 계속 굴러가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일을 하지 않으면 존재가 무너질까 두려워하고
실제로 직장을 잃고 일이 없으면 무너지는 경우를 말함입니다.
요즘 많은 남자 퇴직자들이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존재가 흔들리는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가 관구 봉사자일 때 형제들에게 가끔 한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가부좌 틀고 용맹정진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을 잠시 손에서 놓고 그저 하느님 안에서 빈둥거리라는 겁니다.
하느님 안에서 머물고
하느님 안에서 놀고
하느님에게서 힘을 얻고
하느님에게서 명을 받아 무엇을 한다면
그것이 신앙인다운 존재와 활동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의 12 제자를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먼저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가까이 부르시고, 가까이 머물게 하십니다.
그래야지 기를 받고, 가르침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을 권한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권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권한.
그리고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주어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모든 것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권한을 주시고, 보내십니다.
이 복음을 듣는 우리도 주님께서는 오라시고 가라십니다.
당신께 오라시고
권한과 사명 받아 가라십니다.
존재와 활동.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고 무엇이든 한다.
어떤 존재이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나?
존재와 활동에 따라 밑에서부터 등급을 매긴다면,
무위도식에 외톨이,
외톨이에 일벌레,
무위도식에 한량,
열심히 일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순이 아닐까?
열심히 일하고 더불어 사는 것,
이것이 인간적으로 잘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신앙의 차원에서는 이것으로 부족할 것입니다.
존재든 활동이든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빠져있지요.
신앙인이라면 존재와 활동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셔야지요.
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있는 존재와
늘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하라시는 것을 하는 존재이어야지요.
요즘, 아니 오래 전서부터 수도생활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것으로
과도한 활동주의 또는 일중독이 자주 거론됩니다.
존재의 정체성을 잃고 그저 일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도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일이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마치 계속 굴러가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일을 하지 않으면 존재가 무너질까 두려워하고
실제로 직장을 잃고 일이 없으면 무너지는 경우를 말함입니다.
요즘 많은 남자 퇴직자들이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존재가 흔들리는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가 관구 봉사자일 때 형제들에게 가끔 한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가부좌 틀고 용맹정진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을 잠시 손에서 놓고 그저 하느님 안에서 빈둥거리라는 겁니다.
하느님 안에서 머물고
하느님 안에서 놀고
하느님에게서 힘을 얻고
하느님에게서 명을 받아 무엇을 한다면
그것이 신앙인다운 존재와 활동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의 12 제자를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먼저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가까이 부르시고, 가까이 머물게 하십니다.
그래야지 기를 받고, 가르침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을 권한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권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권한.
그리고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주어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모든 것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권한을 주시고, 보내십니다.
이 복음을 듣는 우리도 주님께서는 오라시고 가라십니다.
당신께 오라시고
권한과 사명 받아 가라십니다.
혼자 있게 된다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은 것입니다.
늘 뭔가를 해야만
뭔가를 움직여야만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욕심이며
허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하는일을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무너지거나
어떤 단체나 기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그런일 하지 않아도 세상은
너무도 잘 굴러갑니다.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얄미울정도로....
참으로 신앙인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손을 놓고
자신안으로
명상안에 들어가 볼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늘을 허비하며 살아갑니다.
때를 미루며
선택의 기로에서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과감한 도전의 용기를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적당히, 대충, 남들 하는 식으로....
뭐 이런 식으론 평생 고생길이 훤합니다.
그것이 한편으론 마음이 편할는지는 몰라도
하느님안에서는 비참한 몰골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참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뭔가 전환점이, 새로운 삶의로의 변혁이
너무도 필요한 시점이라 여겨집니다.
주님앞에 침잠하는 일이
이리도 중요하고 소중한 것임을
누구의 가르침이 아니라
삶으로서, 형제들의 모습안에서
이제서야 겨우 알아감이
늦었지만 고맙고 고마운일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놀고
하느님에게서 힘을 얻고
하느님에게서 명을 받아 무엇을 한다면
그것이 신앙인다운 존재와 활동일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