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바오로 사도는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란 또 무엇이고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보이는 세상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날,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를 얻는 날,
한 마디로 구원받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는 앞의 문맥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란 구원의 희망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보면 희망이 절망인데
그 절망적인 것 안에서 희망의 씨앗을 보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들, 곧 신앙인의 희망이라고 로마서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그 절망적인 것 안에서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우리 신앙인은 희망의 씨앗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과 연결시키면 씨앗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아주 작고
그 작은 것 안에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씨앗 안에 가능성이 있음을 보고
그것을 자기 정원에 심으면 씨앗 안에 가능성으로 있던 것이 틔어나오고,
가능성을 보지 못해 자기 정원에 심지 않으면 그것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씨앗이란 가능성이 있는 작은 것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얘기하면 씨앗이란 현실태이자 가능태인데
이 가능성을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을 가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가능성을 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겁니다.
제가 아는 수녀님 두 분이 암을 얻었습니다.
한 분은 재발이고 다른 한 분은 초발입니다.
재발하신 분이 더 이상 수술과 같은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얼마 후 같은 공동체의 수녀님이 암을 얻으셨는데
그 암이 초기임에도 아예 수술을 받지 않고 자연치유를 하겠다고 하십니다.
두 분 다 젊은 수녀님들인데도 수술하지 않겠다는 것을
공동체가 말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존중하는데 그것은
두 수녀님의 선택 안에 현세 생명에 연연해하지 않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이 결코 현세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겠다는 대단한 신앙이 있음을 같이 믿기 때문이지요.
현세생명이든 영원한 생명이든 자신들의 생명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믿기에
한 편으로는 어떤 가능성이건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오늘 로마서가 얘기하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로마서는 이런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을 거슬러 희망하는 존재이고,
이런 하느님의 자녀가 많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하느님의 자녀가 내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씨앗이 씨앗인 줄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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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내조를 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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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탄식하고 기다리는 피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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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작은 사랑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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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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