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중 제 15주는 이렇게 주님께서 뽑아 세우신 사람,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파견 받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언자, 사도들은 파견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우선 길 떠나는 사람, 곧 여행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아무 것도 지니지 않는데 지팡이만 지니고 떠납니다.
이스라엘에서 지팡이는 여행자란 표시입니다.
집에 정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구와 동거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엉덩이가 무거워 도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놓지 못하는 사람도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아깝지만 놔야 합니다.
뿌리치고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 아프지만 뿌리쳐야 합니다.
포기와 가난은 그래서 사도의 기본입니다.
집이 있어서는 안 되고 길 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집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고, 길동무만 있어야 합니다.
길동무도 많이 있을 필요는 없고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사도들은 길 떠나는 사람인데
그러나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가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라하니 가고, 가라는 곳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놀러 가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절대로 자기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목적이 없으니 어디로 갈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가라시는 데로 가면 됩니다.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는 길을 가다가 갈림길에 다다랐습니다.
옆의 길동무는 어느 길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인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낙천가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만 할 때까지
길동무에게 맴돌기를 계속 하라고 하였습니다.
한참을 맴돌기를 하다가 그만 하라고 하니
길동무는 어지러워 쓰러졌습니다.
프란치스코와 길동무는 쓰러진 쪽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단순하고도 따듯한 얘기이지만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맴돌기란 갈피를 못 잡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피를 못 잡는 것을 부정적으로 얘기하는데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바로 하느님의 이끄심을 찾을 때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길에서 우리가 갈피를 못 잡고
그저 그 자리에서 맴돌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맴돈다는 것은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만 두지도 못하고
계속 갈피, 방향을 찾는 다는 것인데
이제 맴돌기를 그만 둔다는 것은
자기 방향 찾기를 그만 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방향, 자기 목적을 포기할 때
놀랍게도 그 때 하느님이 원하시는 곳이 드러납니다.
파견되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할 지 하느님께 맡길 뿐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하느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자기 목적이 없기에 굳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고집할 것도 없고
그래서 다툴 일이 없습니다.
그저 가는 곳에 주님의 복과 평화를 빌어 주고
그 집이 원하지 않으면 발에 먼지를 툭툭 털고 떠나면 됩니다.
그리고 자기 힘을 믿지 않기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이 있어야 한다고
재주가 있어야 한다고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주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사도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파견되는 사도는 하여 아무 것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행자는 하느님과 사람들이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선의에 대한 믿음과
그저 지팡이만 있으면 됩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파견 받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언자, 사도들은 파견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우선 길 떠나는 사람, 곧 여행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아무 것도 지니지 않는데 지팡이만 지니고 떠납니다.
이스라엘에서 지팡이는 여행자란 표시입니다.
집에 정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구와 동거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엉덩이가 무거워 도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놓지 못하는 사람도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아깝지만 놔야 합니다.
뿌리치고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 아프지만 뿌리쳐야 합니다.
포기와 가난은 그래서 사도의 기본입니다.
집이 있어서는 안 되고 길 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집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고, 길동무만 있어야 합니다.
길동무도 많이 있을 필요는 없고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사도들은 길 떠나는 사람인데
그러나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가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라하니 가고, 가라는 곳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놀러 가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절대로 자기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목적이 없으니 어디로 갈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가라시는 데로 가면 됩니다.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는 길을 가다가 갈림길에 다다랐습니다.
옆의 길동무는 어느 길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인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낙천가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만 할 때까지
길동무에게 맴돌기를 계속 하라고 하였습니다.
한참을 맴돌기를 하다가 그만 하라고 하니
길동무는 어지러워 쓰러졌습니다.
프란치스코와 길동무는 쓰러진 쪽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단순하고도 따듯한 얘기이지만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맴돌기란 갈피를 못 잡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피를 못 잡는 것을 부정적으로 얘기하는데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바로 하느님의 이끄심을 찾을 때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길에서 우리가 갈피를 못 잡고
그저 그 자리에서 맴돌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맴돈다는 것은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만 두지도 못하고
계속 갈피, 방향을 찾는 다는 것인데
이제 맴돌기를 그만 둔다는 것은
자기 방향 찾기를 그만 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방향, 자기 목적을 포기할 때
놀랍게도 그 때 하느님이 원하시는 곳이 드러납니다.
파견되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할 지 하느님께 맡길 뿐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하느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자기 목적이 없기에 굳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고집할 것도 없고
그래서 다툴 일이 없습니다.
그저 가는 곳에 주님의 복과 평화를 빌어 주고
그 집이 원하지 않으면 발에 먼지를 툭툭 털고 떠나면 됩니다.
그리고 자기 힘을 믿지 않기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이 있어야 한다고
재주가 있어야 한다고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주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사도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파견되는 사도는 하여 아무 것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행자는 하느님과 사람들이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선의에 대한 믿음과
그저 지팡이만 있으면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지대로
자기들의 뜻대로
그 뜻이 자기를
온전히 나아가게 하는줄
생각합니다.
나는
나의 상태는
무슨일이 있어도
나의 것은
어떠한 일이 생겨도
포기할 수 없어 합니다.
육신의 허약함과
병약함 앞에서는
더욱 더 그렇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바라보면
사실 이 세상에
내 뜻이란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대자연과 함께 하여야 하는
관계성안에서의 삶,
혼자만의 삶이 아니기에
혼자이어서는
아니되는 삶이기에 말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온전히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내 것이란 없는 가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바보일 수 밖에 없어
존재의 가치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되어 주기에
아무런 불평이나
어떤 망설임도 없이,
살아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바로 옆의 형제를 보는 것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으로,
하루를 사는 것으로,
그것으로 만족하니
아무 바램이 없이도
행복해 합니다.
그 사람은 존재의 근원을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입니다.
존재의 큰 선물을 이미 받았는데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다 하겠는지요.
없음을 잘 알고
행함를 모르는데
채워질 것도
채워질 일도 없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팡이만 있으면 됩니다.
아하~ 이렇게 하면 되는군요.
오늘아침 이 밝은 소식에 눈이 번쩍뜨입니다.
심봉사 눈뜬 것과 같을까요?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