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우리는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내용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연중 제 16주일은 그 사도들이 돌아와 주님을 가운데 두고 모여서
자기가 행하고 가르친 것을 모두 보고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돌아와
모여서 행하고 가르친 것을 모두 보고 드렸다.”
사도단의 이런 모습은 우리 전체 교회의 바람직한 본보기입니다.
파견되어 흩어졌다가는
반듯이 이렇게 다시 주님께 돌아와 모여야 합니다.
주님께 돌아와 모이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께 파견되어 떠난 것도 아니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며
결국 자기 사업을 찾아 흩어져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파견 받은 주님의 제자들은 이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저희 수도회에서는 5명의 새 사제가 태어났습니다.
지금도 첫 미사를 드리러 전국을 다니고 있습니다.
새 사제가 탄생하면 많은 신자들이 모여듭니다.
성사적으로 보면 새 사제의 강복이나, 저와 같은 헌 사제의 강복이나
똑 같은 성사적 효력을 지닙니다.
그것은 복을 내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저와 같은 헌 사제가 서운할 정도로
새 사제한테 몰립니다.
신자들이 새 사제한테는 그들의 순수함과 열성 때문에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서품식에 참석할 때마다 새 사제의 탄생을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 편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어떤 목자인가?
예레미아 서가 말하는 그 목자,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린 목자들!”이 아닐까?
사람들이 나에게서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참 목자라면
예수님처럼 양들에 대한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양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참 목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강론을 잘 하는 사제도 아닙니다.
조직을 잘 관리하는 사제도 아닙니다.
신심운동을 잘 펼치는 사제도 아닙니다.
물론 강론 잘 하고 조직 관리 잘 하며
신심운동을 잘 펼치는 사제라면 좋겠지만
양들에 대한 연민이 없이 이런 것 잘 하면 참 목자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 잘 못해도 양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을 지니고
양들의 아픔과 외로움과 고달픔을 위무하는 사제가 참 목자입니다.
그렇다면 양들의 아픔과 외로움과 고달픔을 잘 위무하기 위해
많은 사제들이 심리학, 그중에서도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는데
상담 심리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참 목자일까요?
연민의 마음에 상담 심리학을 전공까지 하였다면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것과 같지만
이 또한 참 목자의 전형은 아닙니다.
연민의 마음에 상담의 기술까지 갖춘 사람은 사제 아니어도 많습니다.
참 목자는 이렇게 인간적이고 기능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올 해 ‘사제의 해’를 지내며
비안네 사제를 그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참 목자는 이 비안네 사제처럼 성사적이어야 합니다.
먼저 존재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얼굴이 잘 생기고 품행이 방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많이 지내어 그분을 많이 닮은 사람,
즉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다음 성사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강론을 잘 준비하고
성체 성사를 정성껏 거행하여 양들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하고,
병자 성사를 충실히 거행하여 영육의 상처를 치유하며,
고백 성사를 잘 줌으로써 영혼의 때를 씻어주고 위무하는 사람입니다.
이 새벽, 비안네 성인을 생각하며
부끄러운 마음과 더불어 다짐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내용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연중 제 16주일은 그 사도들이 돌아와 주님을 가운데 두고 모여서
자기가 행하고 가르친 것을 모두 보고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돌아와
모여서 행하고 가르친 것을 모두 보고 드렸다.”
사도단의 이런 모습은 우리 전체 교회의 바람직한 본보기입니다.
파견되어 흩어졌다가는
반듯이 이렇게 다시 주님께 돌아와 모여야 합니다.
주님께 돌아와 모이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께 파견되어 떠난 것도 아니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며
결국 자기 사업을 찾아 흩어져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파견 받은 주님의 제자들은 이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저희 수도회에서는 5명의 새 사제가 태어났습니다.
지금도 첫 미사를 드리러 전국을 다니고 있습니다.
새 사제가 탄생하면 많은 신자들이 모여듭니다.
성사적으로 보면 새 사제의 강복이나, 저와 같은 헌 사제의 강복이나
똑 같은 성사적 효력을 지닙니다.
그것은 복을 내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저와 같은 헌 사제가 서운할 정도로
새 사제한테 몰립니다.
신자들이 새 사제한테는 그들의 순수함과 열성 때문에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서품식에 참석할 때마다 새 사제의 탄생을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 편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어떤 목자인가?
예레미아 서가 말하는 그 목자,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린 목자들!”이 아닐까?
사람들이 나에게서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참 목자라면
예수님처럼 양들에 대한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양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참 목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강론을 잘 하는 사제도 아닙니다.
조직을 잘 관리하는 사제도 아닙니다.
신심운동을 잘 펼치는 사제도 아닙니다.
물론 강론 잘 하고 조직 관리 잘 하며
신심운동을 잘 펼치는 사제라면 좋겠지만
양들에 대한 연민이 없이 이런 것 잘 하면 참 목자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 잘 못해도 양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을 지니고
양들의 아픔과 외로움과 고달픔을 위무하는 사제가 참 목자입니다.
그렇다면 양들의 아픔과 외로움과 고달픔을 잘 위무하기 위해
많은 사제들이 심리학, 그중에서도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는데
상담 심리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참 목자일까요?
연민의 마음에 상담 심리학을 전공까지 하였다면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것과 같지만
이 또한 참 목자의 전형은 아닙니다.
연민의 마음에 상담의 기술까지 갖춘 사람은 사제 아니어도 많습니다.
참 목자는 이렇게 인간적이고 기능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올 해 ‘사제의 해’를 지내며
비안네 사제를 그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참 목자는 이 비안네 사제처럼 성사적이어야 합니다.
먼저 존재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얼굴이 잘 생기고 품행이 방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많이 지내어 그분을 많이 닮은 사람,
즉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다음 성사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강론을 잘 준비하고
성체 성사를 정성껏 거행하여 양들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하고,
병자 성사를 충실히 거행하여 영육의 상처를 치유하며,
고백 성사를 잘 줌으로써 영혼의 때를 씻어주고 위무하는 사람입니다.
이 새벽, 비안네 성인을 생각하며
부끄러운 마음과 더불어 다짐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앞에
설득력을 얻으려면
진지한 삶
가식없음에
머무는 삶이겠지요.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신분이나 직분이
마치 자신의 것인양
살아감을 봅니다.
맡겨진 신분과 직분을
그저 행함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에 위안을 받고자 함은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자와
다를바 없지 싶습니다.
베푸는자는 주는 것
그것에 만족하고
받는자는 받음 자체로 감사하고
고마움이 배여나는 삶,
양방향의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성인성녀들은
아무것도
그 어떤 직분이나 가짐도
자기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은 사람들이라
믿습니다.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 감사드립니다.
그 연민으로 말없이
늘 기도에 전념하시는 당쇠 신부님,
보잘것없는 우리들에게
당쇠신부님은 참 목자이십니다.
당쇠신부님을 우리곁으로 보내주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참 목자 입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자녀답게
살아 나가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