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을 마치고 샤워를 하던 끝에 그곳 청소를 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 속에서 일어난 생각에서부터 행위까지는 이렇습니다.
‘아무리 공사 기간이지만 왜 이렇게 지저분해.’
‘왜 형제들은 쓰고서 자기 쓴 것도 치우지 않는 거야.’
‘내가 청소를 해, 말아.’
‘하긴 해야지. 안 하면 마음 찝찝하지.’
‘아니야. 찝찝해서 하면 사랑이 못 돼.’
이런 생각의 과정 끝에 청소를 한 것입니다.
청소를 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러운 꼴을 못 보기에 하는 것이라면
사랑이 아닌, 결국 자기만족의 행위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이렇게 자기만족과 자기중심에서 청소를 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늘 불평불만이 있게 됩니다.
‘루카 복음의 마르타’하면 동생 마리아와 비교되어
이렇게 일을 하다 불평불만을 하는 여인으로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의 마르타는 약간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오셨을 때
마중 나간 건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타였습니다.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마리아는 그냥 집에 있었고
마중 나가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언니 마르타였습니다.
마리아는 주변 돌아가는 거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좋은 것만 하는 새침 떼기의 전형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주변 돌아가는 것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공부나 관상에 몰두하는 그런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얄밉다 하며
너만 그러느냐 나도 그렇게 할 거야 한다면 같이 철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언니 마르타는 역시 어른스럽습니다.
집안 전체를 돌보며 챙길 것 챙깁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또 다른 측면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마르타의 변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이렇게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마르타에게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시자
마르타는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앎을 넘어 믿음으로 발전해가는 우리 신앙의 모델입니다.
그러나 더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의 믿음 고백의 내용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공관복음에서 사도 베드로가 한 고백입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에서 이 고백은
시몬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고 교회의 밑돌이 되게 한,
바로 그 고백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믿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도 오늘,
마르타처럼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하고
믿음을 고백해봅시다.
그때 제 마음 속에서 일어난 생각에서부터 행위까지는 이렇습니다.
‘아무리 공사 기간이지만 왜 이렇게 지저분해.’
‘왜 형제들은 쓰고서 자기 쓴 것도 치우지 않는 거야.’
‘내가 청소를 해, 말아.’
‘하긴 해야지. 안 하면 마음 찝찝하지.’
‘아니야. 찝찝해서 하면 사랑이 못 돼.’
이런 생각의 과정 끝에 청소를 한 것입니다.
청소를 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러운 꼴을 못 보기에 하는 것이라면
사랑이 아닌, 결국 자기만족의 행위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이렇게 자기만족과 자기중심에서 청소를 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늘 불평불만이 있게 됩니다.
‘루카 복음의 마르타’하면 동생 마리아와 비교되어
이렇게 일을 하다 불평불만을 하는 여인으로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의 마르타는 약간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오셨을 때
마중 나간 건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타였습니다.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마리아는 그냥 집에 있었고
마중 나가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언니 마르타였습니다.
마리아는 주변 돌아가는 거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좋은 것만 하는 새침 떼기의 전형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주변 돌아가는 것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공부나 관상에 몰두하는 그런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얄밉다 하며
너만 그러느냐 나도 그렇게 할 거야 한다면 같이 철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언니 마르타는 역시 어른스럽습니다.
집안 전체를 돌보며 챙길 것 챙깁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또 다른 측면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마르타의 변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이렇게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마르타에게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시자
마르타는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앎을 넘어 믿음으로 발전해가는 우리 신앙의 모델입니다.
그러나 더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의 믿음 고백의 내용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공관복음에서 사도 베드로가 한 고백입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에서 이 고백은
시몬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고 교회의 밑돌이 되게 한,
바로 그 고백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믿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도 오늘,
마르타처럼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하고
믿음을 고백해봅시다.
신앙을 고백 하지만
죽더라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것을 입으로 만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으로
진정 믿음을 고백 하며
삶으로 살아 갑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