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의 교회에서
희생양을 흠숭하는 교회에서
희생양으로 살면서
희생양을 만들지 않는 영성
아버지의 자비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자비로 가득하다.
아버지의 자비를 입은 이들은
희생양으로 살면서도 희생양을 만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형태는
끝까지 용서하시고 살리시는 분으로 남아있다.
물리쳐야 할 원수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분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죽으면서 살리셨다.
죽으면서 살리는 영성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내 안에 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죽기를 각오한 일상의 관계 속에서
그분은 나와 내 주변의 관계를 살리신다.
내가 죽지 않으면 둘 다 죽는다.
빠스카의 신비가 매일같이 봉헌되는 미사를 통해 거행되지만
성체를 받아 모신 우리는 희생양이 되길 거부한다.
희생양이 될 때가 있다면 동반 자살을 할 때뿐이다.
미움과 폭력으로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면서 자신을 높이기 때문이다.
성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그 신비를 밝혀 준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이들이 우리의 벗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끼치는 해로움 때문에 구원받는다.”
복음은 우리들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세상으로 만드는 데서 나온다.
그리스도에 의해 해방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차별과 폭력과 편 가르기를 멈춘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이 하느님의 세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하면서 지배와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이다.
종교적 광신에서 나오는 광기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희생을 강요하고 자유를 구속시킨다.
포도나무와 연결된 가지들은 희생양으로 살면서 희생양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포도나무의 열매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