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뿌리를 성찰하기
믿음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은
세례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얼마나 큰 자비의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는지 아는 것이며
타고난 존엄성과 중요성을 깨닫고
그분으로부터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부터 성장한다.
믿음은 그러한 경험을 한 뒤에 비로소 분명해지는 기쁨 충만한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죄인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이며
하느님께 속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연결되었다 해도
여전히 여러 단계의 어둠을 통과해야 하며 위험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살리기 위한 죽음의 현장에서는 고난이 고난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가벼운 짐과 편한 멍에”(마태 11,28-30)로 그 길을 가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사시게 된 것은 우리의 업적과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총으로 주어진 것”(로마 11,6)임을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많이 바쳐서가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응답이기 때문에 관계를 회복하게 만든다.
관계를 좋게 만드는 데 기여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많이 바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관계에 관한 말씀이고 소통과 환대를 일컫는 밀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제쳐두고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의식하고 바치는 기도와 희생과 제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많은 가정에서 가족들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현실을 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자신들이 대면해서 해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하느님께 숙제를 미루면서
자기가 바치는 기도와 제물에만 관심을 보이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은 걸 보면 안쓰럽다.
많은 이들은 기도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는 이미 선물로 받은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경험하게 하는 내적 체험이다.
거기에는 ‘바르고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강박관념과 부담이 없다.
스스로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하느님의 자비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그 나라에 머물기 때문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진행형 나라이며, 결론보다 과정이고, 관념보다 인격적 관계를 통해
누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보는 눈이 관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성은 생활 안에서 구체화 된다.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 협력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기도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먼저 움직이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이제까지 살아온 삶보다 훨씬 더 크게 느끼고
더 큰 기쁨으로 그 길을 걷는 희망을 여기에서 본다.
2020, 1. 25. 설날에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형제 O.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