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태우며 죄인들을 품는 아버지의 품
더 높은 차원에서 보려면 안경을 바꿔야 한다.
하느님 자비의 시선으로 보는 눈을 지혜라고 해도 될까?
내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지혜는 오로지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받은 사랑이 크고 놀라워, 감당할 수 없는 감격 속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돌려드리려는 마음으로 행하는 선이
지혜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통제를 멈추고 놓아주는 자유를 경험하는 이들이 지혜롭다.
동반에는 사랑과 아픔이 따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길과 아픔을 견디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랑과 아픔이 우리를 가르치도록 기다리고 견딜 뿐이다.
아픔을 겪은 후 새롭게 변화된 자신을 발견할 뿐이며
그것이 선물이라는 것을 아픔을 견딘 후에 알아차릴 뿐이다.
하느님 자비의 시선 아래 자신을 두는 이들이 발견하는 선물,
놓아주는 자유, 내려놓는 자유, 내려가는 자유 안에서
기쁨에 찬 가난, 거기서 흘러나오는 선물이다.
이것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응답하는 사랑의 길이다.
서로를 동반하는 여정에서 “뜨거운 감동”을 주는 사랑의 길이다.
그 길은 아픔과 고난의 길이다.
지혜의 선물은 언제나 사랑과 아픔을 지닌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아픔을 지니지 않은 사랑은 없기 때문이며
아픔 자체가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아픔 자체가 하느님께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랑으로 인한 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아픔을 견디는 사랑은 위로부터 받는 사랑을 아는 데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지키고’ ‘바치는’ 데서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집착과
자만심을 강화하는 선에서 머물 때가 많다.
지키고 바치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에 도움이 되거나 사랑이 아닐 때가 많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마태 9,13
하느님 나라의 현재는
기쁜가?
자유로운가?
관계에 도움이 되는가?
이것이 그 나라의 내용이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싶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위격적 사랑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성사로서의 표징은 현재에 존재하는 시간 안에서 그렇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께서 빵을 뗄 때
눈이 열리어 제자들이 경험한 ‘알아보는 눈’과
‘뜨거운 감동’은 우리 시대에도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시선 아래 자신을 두는 이들 안에서 느끼는 아버지의 품이다.
그 품을 아는 이들은 가슴 태우며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눈길을 느낄 때 아픔을 동반한 사랑의 길을 간다.
아버지의 품은 죄인들을 품는 자비 넘치는 품이기 때문에
거기서 보고 배운다.
집 떠난 아들의 귀환을 기뻐하시며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는
그렇게 죄인들을 품으신다. (루가 15,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