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 병을 고쳐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위의 말씀은 오늘 1독서 호세아서의 일부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인 오늘 여러분도 오늘의 호세아서를,
부디 전부,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호세아서는 어머니 또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어떻게 부모의 마음으로 해주셨는지를 애기합니다.
그 첫 표현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철부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식으로 철부지라는 말을 이해를 하면 철을 모르는(不知) 것입니다.
문제는 “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철”에는 쇳덩어리 철도 있지만
때를 뜻하는 철도 있고
분별력, 의미에 대한 깨달음, 지혜의 뜻이 있습니다.
아무튼 철부지 어린 아이 때부터,
그리고 아직도 철부지와 같은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철부지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몰라줍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안아주고 고쳐준 것을 모릅니다.
내가 잘 나갈 때는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인 줄만 알았기에 그분이 없고,
내가 힘들 때는 내 곁에 없었다고 원망하여 그분은 내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리고 모든 것에 우리와 함께 계셔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늘 그리고 모든 것에 함께 하셨기에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공기의 존재는 공기가 없을 때 깨닫게 되고
공기가 없게 되었을 때 고마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못하고 배은망덕해도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올라
사랑을 거두거나 분노를 터트리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사랑을 거두셔야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게 될 텐데
한결같이 사랑하시니 사랑은 은총이 아니라 당연이 되어
그 사랑을 모르게 됩니다.
이런 우리게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그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 당신을 위해서일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오히려 우리를 위해서지요.
행복이 느끼는 사람의 것이듯 사랑도 느끼는 사람의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해줘도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당연이라면
그것이 바로 사랑 불감증의 불행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냄은
아무리 철부지지만 이제라도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느낌으로 그 행복을 만끽하기 위함입니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사랑 감수성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대화에서 어쩌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마음속으로 어떤 변화를 느끼지 않고 들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마치 밖에서
말하는 사람의 소리의 채가 마음 안에 있는 현(弦)을 긁은 듯이
곧 자극을 받아 꿈틀거렸으며 불이 붙었다.”
우리는 이런 프란치스코 부러워하는데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 소리만 나면 마음이 꿈틀거리고
바이올린 활이 현을 긁듯이 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는 두 번째 이유를 보겠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성심을 우리가 닮기 위함입니다.
예수 성심의 사랑으로 불붙은 사람의 마음은 예수 성심을 닮아
이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눕니다.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을 받지 않은 겁니다.
그가 받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냥입니다.
그것도 쥐꼬리만큼 받은 동냥입니다.
내 배 채우기에도 부족한데 무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사람,
그것도 넘치게 받은 사람이라야 사랑을 나눕니다.
첼라노는 윗글에 이어 프란치스코의 사랑 행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동냥을 받고 그 대가로 하느님의 사랑을 주는 것은 숭고한 희사이며,
이것을 돈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야말로 최고의 멍텅구리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이 세상 사물과 관계를 하고 있는 동안
하느님의 사랑으로 동냥을 달라고 하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결코
되돌려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죽을 때까지 어김없이 지켰다.”
그리고 모든 얘기의 결론으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한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이 동냥이 아니고 사랑이라면
우리도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합시다.
하느님을 그리고 이웃을.
그들은 내가 자기 병을 고쳐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위의 말씀은 오늘 1독서 호세아서의 일부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인 오늘 여러분도 오늘의 호세아서를,
부디 전부,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호세아서는 어머니 또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어떻게 부모의 마음으로 해주셨는지를 애기합니다.
그 첫 표현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철부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식으로 철부지라는 말을 이해를 하면 철을 모르는(不知) 것입니다.
문제는 “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철”에는 쇳덩어리 철도 있지만
때를 뜻하는 철도 있고
분별력, 의미에 대한 깨달음, 지혜의 뜻이 있습니다.
아무튼 철부지 어린 아이 때부터,
그리고 아직도 철부지와 같은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철부지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몰라줍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안아주고 고쳐준 것을 모릅니다.
내가 잘 나갈 때는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인 줄만 알았기에 그분이 없고,
내가 힘들 때는 내 곁에 없었다고 원망하여 그분은 내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리고 모든 것에 우리와 함께 계셔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늘 그리고 모든 것에 함께 하셨기에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공기의 존재는 공기가 없을 때 깨닫게 되고
공기가 없게 되었을 때 고마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못하고 배은망덕해도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올라
사랑을 거두거나 분노를 터트리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사랑을 거두셔야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게 될 텐데
한결같이 사랑하시니 사랑은 은총이 아니라 당연이 되어
그 사랑을 모르게 됩니다.
이런 우리게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그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 당신을 위해서일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오히려 우리를 위해서지요.
행복이 느끼는 사람의 것이듯 사랑도 느끼는 사람의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해줘도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당연이라면
그것이 바로 사랑 불감증의 불행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냄은
아무리 철부지지만 이제라도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느낌으로 그 행복을 만끽하기 위함입니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사랑 감수성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대화에서 어쩌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마음속으로 어떤 변화를 느끼지 않고 들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마치 밖에서
말하는 사람의 소리의 채가 마음 안에 있는 현(弦)을 긁은 듯이
곧 자극을 받아 꿈틀거렸으며 불이 붙었다.”
우리는 이런 프란치스코 부러워하는데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 소리만 나면 마음이 꿈틀거리고
바이올린 활이 현을 긁듯이 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는 두 번째 이유를 보겠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성심을 우리가 닮기 위함입니다.
예수 성심의 사랑으로 불붙은 사람의 마음은 예수 성심을 닮아
이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눕니다.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을 받지 않은 겁니다.
그가 받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냥입니다.
그것도 쥐꼬리만큼 받은 동냥입니다.
내 배 채우기에도 부족한데 무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사람,
그것도 넘치게 받은 사람이라야 사랑을 나눕니다.
첼라노는 윗글에 이어 프란치스코의 사랑 행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동냥을 받고 그 대가로 하느님의 사랑을 주는 것은 숭고한 희사이며,
이것을 돈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야말로 최고의 멍텅구리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이 세상 사물과 관계를 하고 있는 동안
하느님의 사랑으로 동냥을 달라고 하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결코
되돌려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죽을 때까지 어김없이 지켰다.”
그리고 모든 얘기의 결론으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한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이 동냥이 아니고 사랑이라면
우리도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합시다.
하느님을 그리고 이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