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운명과 사명
노 무현 전 대통령이 자진하기 전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요.
어떤 수녀님과 영적 대화를 하면서 그분께도
“그것이 수녀님의 운명입니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남보다 앞서는 생각을 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역풍도 만나고 외로운 처지에 처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것이 그분의 운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운명이란 것은 정해진 것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 있고,
이럴 때 운명은 그리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고 사뭇 부정적입니다.
“종의 운명”,
“헤어질 운명”,
“죽어야 할 운명” 등이 그 쓰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해진 운명, 그래서 바꿀 수 없음을 말하면서도
누구에 의해 그렇게 정해졌는지는 모르는 채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 생명과 삶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되어 짐을 수없이 느끼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는 불교나 유교 문화권의 우리는
그것이 누구인지를 모르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를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다고
아주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뜻하시고 섭리하신 인생은 부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하느님은 오늘 요한에게 이름을 주시듯 우리에게 이름을 주십니다.
이름을 주신다는 것은 당신과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당신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대단히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가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어주고,
그래서 아무나 함부로 불러대는 개똥이 쇠똥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정성을 다 해 이름을 지어주시고,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불러주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주신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명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주님의 일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택한 일도 아닌
바로 하느님께서 내게 사명으로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존귀한 존재들이고 품위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종의 운명으로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귀염을 받을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내가 뭐나 된 듯이 우쭐거리지 말아야 할 것이며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책임을 무겁게 생각하며 결코 경거망동하지 말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과 프란치스코는
우리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늘 염두에 두고 산 요한 세례자는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말하였고
자신을 “위대하신 왕의 사신”으로 생각하며 산 프란치스코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고
아주 겸손하게 자신의 존재성을 이야기 합니다.
운명과 사명
노 무현 전 대통령이 자진하기 전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요.
어떤 수녀님과 영적 대화를 하면서 그분께도
“그것이 수녀님의 운명입니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남보다 앞서는 생각을 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역풍도 만나고 외로운 처지에 처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것이 그분의 운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운명이란 것은 정해진 것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 있고,
이럴 때 운명은 그리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고 사뭇 부정적입니다.
“종의 운명”,
“헤어질 운명”,
“죽어야 할 운명” 등이 그 쓰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해진 운명, 그래서 바꿀 수 없음을 말하면서도
누구에 의해 그렇게 정해졌는지는 모르는 채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 생명과 삶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되어 짐을 수없이 느끼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는 불교나 유교 문화권의 우리는
그것이 누구인지를 모르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를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다고
아주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뜻하시고 섭리하신 인생은 부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하느님은 오늘 요한에게 이름을 주시듯 우리에게 이름을 주십니다.
이름을 주신다는 것은 당신과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당신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대단히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가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어주고,
그래서 아무나 함부로 불러대는 개똥이 쇠똥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정성을 다 해 이름을 지어주시고,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불러주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주신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명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주님의 일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택한 일도 아닌
바로 하느님께서 내게 사명으로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존귀한 존재들이고 품위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종의 운명으로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귀염을 받을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내가 뭐나 된 듯이 우쭐거리지 말아야 할 것이며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책임을 무겁게 생각하며 결코 경거망동하지 말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과 프란치스코는
우리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늘 염두에 두고 산 요한 세례자는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말하였고
자신을 “위대하신 왕의 사신”으로 생각하며 산 프란치스코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고
아주 겸손하게 자신의 존재성을 이야기 합니다.
왜? 날 구해줄 수 있으신데, 당신의 때만을 기다리라고 하시니,
너무 힘들어서요. 근데 그러고 나니, 제 주제 파악을 잘 못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쭈그러져 있으려합니다.
내가 육적일 때는
내 사주팔자 안에 하느님을 끌여들였지만
내가 영적으로 바뀌어 가니
하느님의 사주팔자로 바뀌어 감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