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Resurrection(1998 – 2003)
작가 : 다미엔 허스트 (Damien Hirst 1965 ㅡ)
크기 : 2134 x 2134 x 2134 mm | 84 x 84 x 84 in
재료 : 유리. 철. 알미늄, 채색한 인간 해골
소재지 : 영국 런던 테이트(Tate Museum) 미술관
부활은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이기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가장 많이 표현되고 있으며 예술에서도 부활에 대한 것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많은 성화들이 성서에 나타난 부활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게 대부분이다.
어떤 시기에 와서는 부활 사건의 배경이 예루살렘의 골고타가 아니라 자기들의 삶의 정황에 맞는 배경을 설정해서 주님께서는 바로 자기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 부활하셔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 부활 신앙의 핵심을 설득력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부활신앙에 있어서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아무도 없기에 난감한 마음을 지니기도 하나 그리스도 부활은 확인한 제자들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확실성을 믿기에 부활 신앙은 교회 안에 항존 해올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부활신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이 중요한 만큼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새로운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과거의 부활 표현은 예술적인 가치로서는 몰라도 신앙 차원에서는 현대인들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많은 부활을 주제로 한 성화들은 주로 마태오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빈무덤을 주제로 전개되는 것이 보통이나 이것은 성서의 시각적 표현으로서는 의미가 있으나 부활 신앙의 핵심을 표현하지 못하면서 예수의 시체 소생 수준의 부활 신앙을 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의 부활 신앙이 십자가의 죽은 예수님의 시체 소생과 같은 관점으로 믿는 것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나 아직 이런 관점이 부활의 핵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예수 부활 사건은 바로 당시부터 유대 지도자들의 조작에 의해 다음과 같은 소문을 만들어 부정했으나 부활 신앙은 끊임없이 교회안에서 믿음의 활력소로 남게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고 하여라 .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이 해주겠다.”
( 마태오 28: 13- 15)
미국 프란치스코회 신부로서 고루하고 쇠약한 교회에 영성적 생기와 활력을 주고 있는 리쳐드 로어 (Richard Rohr) 신부는 최근 출판된 그의 저서 ” 보편적 그리스도“ (Universal Christ)에서 오늘 교회가 새롭게 해석해야 할 부활 신앙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만일 어떤 크리스챤이 부활 신앙의 확실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 예수의 무덤 앞에 비디 오 카메라 를 설치해서 그분의 부활 현장을 취재하고자 한다면, 결코 무덤 으로부터 걸어나오는 한 남자에게 초점을 맞춰 촬영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것은 시체 소생이라는 차원에서는 의미 있 지만 부활한 예수의 진면모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p.246)
”예수 부활은 모든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여정은 ” 실제로 만물을 가르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이점에 있어 동방교회가 예수의 부활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 동방교회의 성화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어둠과 무덤들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채 지옥으로부터 영혼들을 빼어내는 모습으로 서 계시면서, 모든 이를 구하시려는 사랑의 주님을 표현했는데, 서방 교회는 예수 부활을 단순히 그리스도에게 한정 시킴으로 부활의 풍성한 의미를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작가는 전위적 취향이 있는 작가중에서도 좀 특이하며 작품의 소재가 매우 특이한 것을 선택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의아함을 주는 일방 많은 사람들에게 극단적 지지를 받고 있는 작가이다.
실제 상어를 방부액에 담은 것이나 해골에다 수많은 보석을 박은 작품을 만들거나 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집요한 추적을 하는 작가인데, 놀랍게도 이런 특이한 작가의 작품에 많은 사람이 몰리면서 그의 작품이 천정 부지의 가격에 팔려 전위 예술가로서 드물게 이상한 작품을 만들어 돈방석에 앉은 좀 예외의 작가이다. 그는 삶의 현장과 세상에 널부러진 죽음의 흔적에서 생명을 찾게 만드는 특별한 작품경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해골에 다이어먼드를 박아 순수 제작비만 약 220억이 되는 조각품을 우리 돈으로 1000억에 팔았으며, 2008년에 만든 금송아지 작품은 180억에 팔릴 만큼 다른 작가와 비길 수 없는 특별한 열렬 추종자들과 혐오자들을 동시에 포용하는 작가이다.
작가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면서 한편 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작가는 이런 특별한 주제를 선택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항상 자신을 붙들고 있는 화두는 ”나는 죽어가는 인생의 한계를 분명히 의식면서도 영원을 살고 싶다는 염원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거부하거나 젊음을 붙들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인생을 죽어가는 것이기에 삶의 노화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면서도 영생에의 희망을 키우는 것이 사람다운 것임을 강조했다. 작가의 생각은 성서적인 바탕과는 무관한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자들의 인생관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일시적이지만 육신을 지배하는 영혼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정념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이성과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주장했다.
작품의 중간에 해골이 있다. 유리로 투명한 벽에 실물 크기의 채색된 해골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으로 팔을 벌리고 있다. 가슴 갈비뼈 부분과 엉치뼈 주변에 있는 붉은 핏자국 흔적은 그가 아득바득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의 분신이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들은 여기 달린 물체처럼 얼마 후 해골이 될 처지이나 현재 살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징후에 매달려 희노애락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성공과 행복에의 꿈을 키우며 서성대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바로 이 해골처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미래의 해골들이다.
그러나 이 허망한 존재가 유한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하늘을 향해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라도 그가 영원에의 갈망을 지닐 때 이 세상은 투명한 유리처럼 어떤 장애도 장벽이 될 수 없음을 알리고 있다. 투명한 유리 장식은 어떤 장애도 꺽을 수 없는 영원을 향한 삶을 열린 인생의 자유로운 실상의 상징과 같다.
작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작가의 쉬임없는 사색의 주제였으며 여기에서 작가는 영생에 대한 결론으로 이 주제를 마무리 해서 작가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면서 영원한 삶에의 갈망을 키우고 있다.
작가는 집요스럽게 유한한 인생에서 무한을 향한 인간 집념의 고귀한 표현을 부활이라는 주제로 셜득력있게 표현했다. 작가는 크리스챤 도상학이나 희랍 신화에서 항상 부활의 상징으로 등장하던 나비를 통해서도 영생에의 희원을 표현하기도 했다. 애벌레가 고치 속에 같혀 지나다가 나비가 되면 하늘을 나르는 것처럼 인간도 현세 삶이란 고치속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통해 나비의 자유로운 처지가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현세 현세 삶의 유한성을 제시하며 영생에의 희원을 인간다움의 중요한 것으로 제시했으나 영생의 실재적 의미가 무었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음으로 그의 이론은 우리의 부활 신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죽음으로 인생의 한부분을 마무리한 영혼을 위한 장례미사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친다: ”과연 주님을 믿는 이에겐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 감이오니, 이 세상 삶이 끝난 다음에 천국에서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리라 믿나이다.“
이런 기도로 선량한 인간이 다다를 부활한 영혼의 천국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현세에서 겪었던 많은 고통에서 해방된 상태라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 구체적인 실상은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교회의 가르침 역시 너무 성서의 내용을 반복하는 수준이기에 새로운 시각으로 신앙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별 흥미도 매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교회가 사람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기 위해선 신앙의 재해석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루가 다르게 빠른 변화를 하고 있는 현대에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이 갈수록 설득력을 잃어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며 이것이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을 좋은 길이 될 것이다.
요즘 온 세계가 코로나라는 신종 바이러스에 시달리고 있다. 인류 질병사에서 호열자나 페스트는 대단한 살상력으로 인간 사회를 파괴했으나 이렇게 과학이 발달된 현대에 온 세계로 급속도로 전이되면서 코로나가 주는 삶의 질의 파괴는 과거와 비길 수 없는 새로운 양상이며 인간의 미래는 새롭게 해석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끝없는 재앙의 연속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기운을 던지고 있다.
오늘 코로나를 과거 만병 통치약으로 여겼던 경옥고나 우황 청심환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듯이 교회의 신앙 표현 역시 새로운 해석과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교회는 복음적 생기를 보일 수 있는 생명의 공동체로 변화될 것이다.
성서적 표현과는 다르면서도 성서적 부활 신앙이 현대인들에게 더 각인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작가의 작품은 크리스챤 부활 신앙이 시체 소생과 같은 차원에서 벗어나 생기있는 새로운 차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주고 있다.
작가는 크리스챤도 아니고 성서적인 바탕으로 부활을 이해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본성안에 있는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 , 즉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죽어야 할 운명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영원을 살고픈 염원을 막연하게나마 확실히 표현한 것만으로도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수 만년 전 인간 원조인 원시인과 , 인간을 닮은 몸체를 가진 유인원은 골격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원시인의 무덤은 아무리 미개해도 근처 죽음의 흔적을 남기고 있으나, 유인원은 아무리 지능이 발달한 것이라도 결코 죽음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작가의 부활에 대한 시도는 하느님을 향해 살고픈 인간의 근원적인 시도라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체 소생을 부활로 여기는 것은 안타깝게도 너무도 멋진 예술 부활신앙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부활 신앙이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편협한 신앙을 부활로 여기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교회를 매력 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반면 신앙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자기 삶에서 구체적인 희망을 지닌 사람들을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 볼 수 있으며 작가의 작품들은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에게 삶의 의미 발견과 생기를 줄 수 있고 구태의연한 신앙에서 탈피할 수 있는 좋은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고백할 때. 이 육신 부활은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육신이 죽음 후 시체 소생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육신은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흙으로 빚어진 인간을 말하나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이 흙과 같은 육신도 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신다는 뜻이있다.
육신 부활은 크리스챤인 우리에게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심을 알리는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신약성서에 두 번 하느님은 사랑이심이 드러나고 있는데(1요한 4,16), 육신 부활은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바로 사랑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육신은 흙처럼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흙과 같은 인간의 육신도 마지막 날에 의미를 찾게 만들어 주신다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람의 진정성과 하느님의 열정을 알려주는 것이다.
입에 발린 사랑이나 전례 기도에 나오는 형식적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너무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람의 산 표현이 바로 육신부활이다.
오늘 우리들은 성서의 내용을 반복하는 판에 박은 주입식 부활 신앙이 아닌 작가처럼 과거에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에서 부활 신앙을 체험하게 될 때 그 부활 신앙은 단순한 기억이 아닌 우리 삶의 활기를 불어 넣고 주위 사람에게 신앙의 멋스러움을 줄 수 있는 향기로운 신앙이 될 것이다.
작가는 영국인이니 크리스챤으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그의 어떤 작품에서도 제도적인 교회의 신앙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작품 안에 영원을 살기 위한 노력을 보임으로서 제도적인 교회의 신자들이 형식적이며 생각없이 살아가면서 주지 못하는 부활 신앙에 대한 희원과 생기를 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는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바하지 못하리라 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 8-9)
작가는 성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의 체험을 통해 죽음으로 끝날 수 없는 인간 삶의 실상을 설명하면서 이것을 바로 부활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결국 인간은 부활이 있을 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고 이 부활이란 현세 삶에 있어서 꺼지거나 지워질 수 없는 희망에의 확신임을 전하고 있다.
마치 순교자들이 혹독한 박해의 순간에 죽음 후의 부활과 영생을 생각하면서 변절에의 유혹과 혈벌의 고통을 극복한 그 영웅적 결단을 작가는 바로 자기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 해골이 곧 부활로 이어지고 또 보석을 박은 해골이 해골이라는 죽음의 상징안에 영원한 생명에로의 부활이라는 희망이 보석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오늘 우리가 극복해야 할 부활 신앙은 예수님의 시체 소생의 차원으로 목박아 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해골처럼 생명이 없는 부활 신앙의 허상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전위 예술가로서 인간은 죽음으로 결코 끝날 수 없는 존재임에 대한 자기 신념을 작품으로 표현함으로 오늘 크리스챤들인 우리가 벗어나야 할 시대착오적인 부활 신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작가의 작품은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예언성을 드러내고 있다.
성서의 부활은 부활하신 주님의 삶으로 정향되어 있기에 크리스챤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선 주님처럼 극단의 사랑의 삶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부활을 갈망하면서도 정확한 목표가 없다.
그러나 둘의 공통점은 죽음으로 꺽일 수 없는 희망이 인간다움의 최고봉이며,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바로 부활에의 희원을 언제나 기억하면서 현세에 주저하거나 타협함이 없이 최선을 향한 끝없는 행진을 삶의 목표로 여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가의 부활 주제의 작품이 천정 부지의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 크리스챤들의 부활 신앙 역시 시대 표징안에서 재해석될 때 부활신앙의 멋스러움과 생기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누군가 말한 우리와 전혀 다른 관점과 시각에서 부활 신앙을 생기있게 표현하는 이 작가는 ”하느님을 찾는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