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오늘 복음에서 두 인물의 행위가 서로 교차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으며
사람들이 세례를 받은 뒤에는 예수님의 세례 받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구조는 분명 두 인물의 행위를 부각시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이 말씀을 듣는 독자들에게 깊은 의미를 찾도록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며 회개의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물’은 성경 안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세 가지 체험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물’은 어둠과 혼돈 즉, 죽음의 의미입니다.
물은 고대인들에게 홍수의 이미지 안에서 느끼는 혼돈과 난파선에서 볼 수 있듯이 바다는 사람들 집어삼키는 괴물이라고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욥기와 시편에서 바다나 바다의 괴물과의 투쟁이라는 주제가 나오게 되었고, 탈출기에서는 갈대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데에 대한 찬미의 노래가 이어지며, 묵시록에서는 하느님께서 “바다의 괴물”을 아주 해치우시고, “바다가 없어지게 되는 것”은 종말의 희망에 속하는 것이라 얘기합니다.(묵시 21,1)
두 번째로 ‘물’은 생명의 원천을 뜻합니다.
이는 특별히 사막 근처에 사는 유목 민족들에게 해당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을 신의 선물로 인식했으며, 유목민들에게 샘이나 오아시스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편 42,2절은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통해 생명의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물’은 정화의 의미를 지닙니다.
물은 마시는 데에만이 아니라 씻고 목욕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고대 문화에서는 불결함으로 인해서 공동체에서 분리된 사람은 물로 씻음으로 해서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에 빠져 죽은 사람은 신이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이스라엘에서는 정화의 관념이 전면에 위치합니다. 여기에서 정화란 육체적인 불결과 윤리적인 불결, 그리고 예식적인 불결을 모두 의미합니다.
이러한 ‘물’에 대한 고대근동 지방의 문화와 구약의 성서적 배경 안에서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푸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면서도 장차 내 뒤에 오실 그분에 대한 희망의 마음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그분을 소개한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과연 이 ‘성령’과 ‘불’을 통해 베풀어지는 세례는 어떠한 모습인가?
이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사람들이 씻겨진 그 물 안으로 직접 발을 딛고 들어가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사람들이 세례받은 그 물은 어떠한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인간의 온갖 죄를 드러내는 더러움과 폭력의 역사 한 가운데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시며 깨끗함 자체이시면서도 기꺼이 그 물 한가운데에 자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그 세례의 표징은 오늘날 우리에게 강력한 신앙의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놀랍게도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고 우리에게도 세례의 성사로 이 사랑의 길을 걷도록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기 싫어하고 더럽고 외면하고 싶은 그 길을 먼저 걸어가셨기에 우리에게는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깊은 어두움과 두려움, 상대방의 허물과 과오들 안에 그저 물 속에 잠겨있으라 말씀하시는데 왜 그토록 우리는 물 밖에서 서성대고만 있는지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말씀하시네요.
이러한 의미에서 불과 성령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에로 변화시키는 화해와 일치의 세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1독서의 이사야서의 말씀에서도 주님의 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이사야서에서도 모든 근원적인 문제를 폭력과 억압의 강력한 힘의 원리로 해결하거나 감추기 보다 그저 외치지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가운데 그의 손을 잡아주며 꺼져 가는 희망의 심지를 살려내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세례 때에 맹세한 서약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반성해보고자 합니다.
세례 때의 서약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불과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는 작은 형제회의 서품식과 서약식 그리고 참사회의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오늘 듣고 받아들인 불과 성령의 세례는 서품식과 서약식 안에서 그 의미를 함께 되새길 수 있을 것이며, 참사회의와 관구회의 등 중요한 회의들 안에서는 우리가 서약한 바를 어떻게 복음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시간입니다.
오늘날 우리 관구가 양적으로 성장해나가면서 외적으로는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듯 보여지지만, 우리의 삶을 면밀히 바라보면 삶의 곳곳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세례축일의 복음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형제들의 어두움 안에서 혹은 문제를 일으키는 우리 관구의 행정을 보면서 일방적인 판단과 평가만 할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어두움과 심각해진 사안들의 과오들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함께 나누며 성령의 움직임을 발견해 나간다면 우리가 서약한 바를 충실히 지키게 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두 인물의 행위가 서로 교차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으며
사람들이 세례를 받은 뒤에는 예수님의 세례 받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구조는 분명 두 인물의 행위를 부각시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이 말씀을 듣는 독자들에게 깊은 의미를 찾도록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며 회개의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물’은 성경 안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세 가지 체험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물’은 어둠과 혼돈 즉, 죽음의 의미입니다.
물은 고대인들에게 홍수의 이미지 안에서 느끼는 혼돈과 난파선에서 볼 수 있듯이 바다는 사람들 집어삼키는 괴물이라고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욥기와 시편에서 바다나 바다의 괴물과의 투쟁이라는 주제가 나오게 되었고, 탈출기에서는 갈대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데에 대한 찬미의 노래가 이어지며, 묵시록에서는 하느님께서 “바다의 괴물”을 아주 해치우시고, “바다가 없어지게 되는 것”은 종말의 희망에 속하는 것이라 얘기합니다.(묵시 21,1)
두 번째로 ‘물’은 생명의 원천을 뜻합니다.
이는 특별히 사막 근처에 사는 유목 민족들에게 해당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을 신의 선물로 인식했으며, 유목민들에게 샘이나 오아시스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편 42,2절은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통해 생명의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물’은 정화의 의미를 지닙니다.
물은 마시는 데에만이 아니라 씻고 목욕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고대 문화에서는 불결함으로 인해서 공동체에서 분리된 사람은 물로 씻음으로 해서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에 빠져 죽은 사람은 신이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이스라엘에서는 정화의 관념이 전면에 위치합니다. 여기에서 정화란 육체적인 불결과 윤리적인 불결, 그리고 예식적인 불결을 모두 의미합니다.
이러한 ‘물’에 대한 고대근동 지방의 문화와 구약의 성서적 배경 안에서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푸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면서도 장차 내 뒤에 오실 그분에 대한 희망의 마음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그분을 소개한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과연 이 ‘성령’과 ‘불’을 통해 베풀어지는 세례는 어떠한 모습인가?
이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사람들이 씻겨진 그 물 안으로 직접 발을 딛고 들어가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사람들이 세례받은 그 물은 어떠한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인간의 온갖 죄를 드러내는 더러움과 폭력의 역사 한 가운데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시며 깨끗함 자체이시면서도 기꺼이 그 물 한가운데에 자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그 세례의 표징은 오늘날 우리에게 강력한 신앙의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놀랍게도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고 우리에게도 세례의 성사로 이 사랑의 길을 걷도록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기 싫어하고 더럽고 외면하고 싶은 그 길을 먼저 걸어가셨기에 우리에게는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깊은 어두움과 두려움, 상대방의 허물과 과오들 안에 그저 물 속에 잠겨있으라 말씀하시는데 왜 그토록 우리는 물 밖에서 서성대고만 있는지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말씀하시네요.
이러한 의미에서 불과 성령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에로 변화시키는 화해와 일치의 세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1독서의 이사야서의 말씀에서도 주님의 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이사야서에서도 모든 근원적인 문제를 폭력과 억압의 강력한 힘의 원리로 해결하거나 감추기 보다 그저 외치지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가운데 그의 손을 잡아주며 꺼져 가는 희망의 심지를 살려내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세례 때에 맹세한 서약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반성해보고자 합니다.
세례 때의 서약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불과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는 작은 형제회의 서품식과 서약식 그리고 참사회의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오늘 듣고 받아들인 불과 성령의 세례는 서품식과 서약식 안에서 그 의미를 함께 되새길 수 있을 것이며, 참사회의와 관구회의 등 중요한 회의들 안에서는 우리가 서약한 바를 어떻게 복음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시간입니다.
오늘날 우리 관구가 양적으로 성장해나가면서 외적으로는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듯 보여지지만, 우리의 삶을 면밀히 바라보면 삶의 곳곳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세례축일의 복음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형제들의 어두움 안에서 혹은 문제를 일으키는 우리 관구의 행정을 보면서 일방적인 판단과 평가만 할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어두움과 심각해진 사안들의 과오들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함께 나누며 성령의 움직임을 발견해 나간다면 우리가 서약한 바를 충실히 지키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