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성공과 실패의 차원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무엇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서 단층적으로 보면 그것이 전부이고 끝인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굳이 실패한 것이 있다면 젊은이들과 관련한 것들입니다.
제 조카들 중에 하나라도 수도자로 만들고 싶었는데
열 셋 중에 아직 한 놈도 수도자가 된 놈이 없습니다.
아직 여섯이 남아 있긴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것 같습니다.
조카들이 제 기대를 배반한 것도 있지만
제가 조카들을 적극적으로 끌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생활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 것 사실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고 실패율이 높기 때문이고,
제가 아는 한 조카들도 영 미덥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패는 조카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제가 흑심을 품었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흑심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놈 잘 키워서 수도자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색은 하지 않고 공을 들였는데
어느 날 ‘저 시집가요, 장가가요’하고 휭 떠나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 얘기를 묵상하면서 저를 반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그럼에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부르셨는데
저는 제 조카들을 인간적으로 따져보고 끌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하느님께서 뽑으시고
하느님께서 키우시고
하느님께서 이끄시고
하느님께서 힘주신다고 말로는 하면서
실제로는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께 조카들을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저에 비추어
고기를 낚는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들로 만들겠다는
예수님의 그 믿음과 확신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제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제자들, 나중에 확인되었듯이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제 조카들이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란
고기 낚는 어부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또 그렇게 되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당신의 헌신의지가 합해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엇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은총에 부응하는 우리의 헌신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과 확신으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침입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무엇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서 단층적으로 보면 그것이 전부이고 끝인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굳이 실패한 것이 있다면 젊은이들과 관련한 것들입니다.
제 조카들 중에 하나라도 수도자로 만들고 싶었는데
열 셋 중에 아직 한 놈도 수도자가 된 놈이 없습니다.
아직 여섯이 남아 있긴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것 같습니다.
조카들이 제 기대를 배반한 것도 있지만
제가 조카들을 적극적으로 끌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생활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 것 사실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고 실패율이 높기 때문이고,
제가 아는 한 조카들도 영 미덥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패는 조카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제가 흑심을 품었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흑심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놈 잘 키워서 수도자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색은 하지 않고 공을 들였는데
어느 날 ‘저 시집가요, 장가가요’하고 휭 떠나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 얘기를 묵상하면서 저를 반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그럼에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부르셨는데
저는 제 조카들을 인간적으로 따져보고 끌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하느님께서 뽑으시고
하느님께서 키우시고
하느님께서 이끄시고
하느님께서 힘주신다고 말로는 하면서
실제로는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께 조카들을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저에 비추어
고기를 낚는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들로 만들겠다는
예수님의 그 믿음과 확신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제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제자들, 나중에 확인되었듯이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제 조카들이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란
고기 낚는 어부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또 그렇게 되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당신의 헌신의지가 합해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엇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은총에 부응하는 우리의 헌신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과 확신으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침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은총에 부응하는 우리의 헌신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하~ 바로 이렇군요.
회색 하늘이 환하게 빛을 내는 아침 입니다.
한 인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끝까지 포기 하지 않는
사랑의 의지는 한계 지어진 인간에게 쉽지 않은 과제란 걸
경험적으로 조금은 알아듣겠습니다.
상대와 상관없이 내가 상대를 포기하지 않고
믿어주는 그 믿음, 그 믿음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늘려가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고 아픔이더군요,
그 과정 속에서 불완전한 인간, 한계 지어진 인간인
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알게 되는 만큼
자기 확신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함께 가는 거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도 무엇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은총에 부응하는 우리의 헌신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래와 맞닿아 있노라 하신말씀..
마음에 담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로 기뻐하거나 실망하지않고
주님 주시는 새 힘으로 오늘도 盡人事待天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