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공적인 프란치스칸 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는데,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마음의 가난이라고 하면서
따라서 프란치스칸, 특히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은
이 마음의 가난만 잘 살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마음의 가난만 사신 분이 아니고
분명 물질적인 가난도 철저히 사신 분이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이런 것이지만
우리는 그만큼 가난을 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맞추어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려 이해하곤 합니다.
겸손하다면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고 자기보다 뛰어난 것도 인정할 텐데
교만하기에
자기를 초월하는 것은 도무지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도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인간 예수가
어떻게 그리 천상적인 지혜를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인정하려들지 않고 심지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이 나왔다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 뻔한데도
오늘 복음의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인간 예수가
어디서 그 지혜와 능력이 생겼는지 의아해하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도 그들이 믿지 않음을 놀라워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놀라운 지혜를 말하는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주님은 믿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월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가까울수록 그러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저희 형제들이 강론하기 제일 싫어하는 대상은
같이 사는 형제들입니다.
나의 인간적인 약점까지 훤히 알고 있는 형제들 앞에서
영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스스로 찔려서 그러하기도 하지만
형제들도 숫제 모르는 사람이 와서 얘기하는 것보다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이기에 저는 예수님처럼 놀라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잘 알수록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잘 알수록 교만해지고 초월과 신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모르고 있는 너를 알라는 말씀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모르는지 알아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초월과 신비를 인정하는 겸손한 지혜를
주님, 주소서.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마음의 가난이라고 하면서
따라서 프란치스칸, 특히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은
이 마음의 가난만 잘 살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마음의 가난만 사신 분이 아니고
분명 물질적인 가난도 철저히 사신 분이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이런 것이지만
우리는 그만큼 가난을 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맞추어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려 이해하곤 합니다.
겸손하다면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고 자기보다 뛰어난 것도 인정할 텐데
교만하기에
자기를 초월하는 것은 도무지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도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인간 예수가
어떻게 그리 천상적인 지혜를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인정하려들지 않고 심지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이 나왔다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 뻔한데도
오늘 복음의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인간 예수가
어디서 그 지혜와 능력이 생겼는지 의아해하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도 그들이 믿지 않음을 놀라워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놀라운 지혜를 말하는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주님은 믿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월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가까울수록 그러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저희 형제들이 강론하기 제일 싫어하는 대상은
같이 사는 형제들입니다.
나의 인간적인 약점까지 훤히 알고 있는 형제들 앞에서
영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스스로 찔려서 그러하기도 하지만
형제들도 숫제 모르는 사람이 와서 얘기하는 것보다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이기에 저는 예수님처럼 놀라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잘 알수록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잘 알수록 교만해지고 초월과 신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모르고 있는 너를 알라는 말씀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모르는지 알아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초월과 신비를 인정하는 겸손한 지혜를
주님, 주소서.
참 진리로 기뻐하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 봅니다.
인간 조건이 동일하기에
자신을 통해서 남도 알아간다고 하고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있고
'나' 좋은 것' 너'도 좋고 '나' 싫은 것 '너'도 싫다는 황금률이 있는 거겠지요.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는데
남을 통해서 나를 알아 간다면 얼마나 힘든 일일까 생각하니
나를 통해 남을 알아가도록 배려하신 하느님께 고개 숙일 수밖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싶은 거지요.
참으로 육을 취해 오신 현실의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