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복음사가들의 시각차를 극명하게 드러내줍니다.
왜 그러시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방 여인에 대한 차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십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이방인은 강아지라고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을 위해 쓴 마태오 복음은 여기서 한 술 더 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지만
이방인을 위한 복음인 루카 복음은 이 내용을 아예 빼버립니다.
루카는 이 복음 말씀이 꽤나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루카 복음사가를 불편하게 하고
시로페니키아의 여인을 당황스럽게 할 뿐 아니라
저도 적지 아니 불편하게 하고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러실 수가 있나?
이것이 예수님의 진심인가?
여인에 대한 시험인가?
이러실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 왜 이러시느냐고 묻기 전에
이러실 분이 아니라고 믿는지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선 민족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선 남녀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선 빈부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똑 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가?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이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지 궁구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물론 좋은 뜻일 것입니다.
믿음의 시험을 통해서 여인의 믿음을 강화하고,
믿음의 시험을 통해서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시기 위함 아닐까요?
시험은 현재 실력에 대한 평가입니다.
시험은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것도 드러내지만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 것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시험이 싫겠지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시험이 싫을 이유가 없습니다.
시험은 또한 실력을 강화하고 증진시킵니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를 더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험의 더 큰 목적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의 겸손과 겸손에서 비롯된 굳은 믿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이방인인 백인대장에게도 사랑을 베푸시고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그렇게 모질게 시험하심은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훌륭한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처럼
제자들에게 그리고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 훌륭한 믿음의 전범을 드러내 보이시고 배우게 하심일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여인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믿음의 시험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어떻든 모질고 가혹합니다.
이사악을 바쳐야하는 아브라함의 시험은 너무도 가혹한 것처럼
시험은 어떻든지 가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 힘을 내라고.
주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믿으라고.
왜 그러시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방 여인에 대한 차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십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이방인은 강아지라고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을 위해 쓴 마태오 복음은 여기서 한 술 더 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지만
이방인을 위한 복음인 루카 복음은 이 내용을 아예 빼버립니다.
루카는 이 복음 말씀이 꽤나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루카 복음사가를 불편하게 하고
시로페니키아의 여인을 당황스럽게 할 뿐 아니라
저도 적지 아니 불편하게 하고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러실 수가 있나?
이것이 예수님의 진심인가?
여인에 대한 시험인가?
이러실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 왜 이러시느냐고 묻기 전에
이러실 분이 아니라고 믿는지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선 민족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선 남녀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선 빈부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똑 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가?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이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지 궁구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물론 좋은 뜻일 것입니다.
믿음의 시험을 통해서 여인의 믿음을 강화하고,
믿음의 시험을 통해서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시기 위함 아닐까요?
시험은 현재 실력에 대한 평가입니다.
시험은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것도 드러내지만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 것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시험이 싫겠지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시험이 싫을 이유가 없습니다.
시험은 또한 실력을 강화하고 증진시킵니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를 더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험의 더 큰 목적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의 겸손과 겸손에서 비롯된 굳은 믿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이방인인 백인대장에게도 사랑을 베푸시고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그렇게 모질게 시험하심은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훌륭한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처럼
제자들에게 그리고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 훌륭한 믿음의 전범을 드러내 보이시고 배우게 하심일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여인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믿음의 시험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어떻든 모질고 가혹합니다.
이사악을 바쳐야하는 아브라함의 시험은 너무도 가혹한 것처럼
시험은 어떻든지 가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 힘을 내라고.
주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믿으라고.
여인을 믿음을 통해서 오늘날 저에게까지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주고 계시네요.
그리고.... “아가리”라는 표현을 읽으면서 ㅎㅎ 마구~웃었답니다..킥킥킥~^^
아주 쬐끔 놀랐지만,무언가 신부님을 화나게 하는 일이있었나 생각했답니다..ㅎㅎ
근데..신부님과 가까와진듯한 친밀감이 마구 느껴져서 무척 좋습니다..ㅎㅎ
댓가를 치루지않고는 얻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가 뚜렷하다면 감정, 체면, 수치..
작은 것들에 걸려 넘어지지않고 꿋꿋이 이겨내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능력이라고 깨닫습니다.
.
자식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모욕, 자존심이 상하는 것쯤이야
끄떡없이 견디는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주인의 픙성한 잔치상에 참여하게하는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할 제자의 겸손한 모습을 배우고갑니다.
잠을 설쳐서 타자말자 잠들었는데 대전쯤 눈을뜨니
함박 눈이 펑펑내리며 온 세상이 새하얗게..
가지들이 팔을 벌려 눈을 안고 주님을 찬양하고 있어요.
한 폭의 수묵화처럼 솜털같은 함박 눈이 소복쌓이고..
마음에 한없는 위로와 기쁨이 밀물처럼 밀려왔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설경을 평생 처음 봤어요..^^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선물에 감동되어 넋을 잃고 바라봤어요.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찬양을 부르며 눈물이 줄줄..ㅎㅎ
하느님 우리 아빠! 솜씨도 좋으시고.. 아빠! 고마워요 사랑해요♡
말씀이 강조 되어 명쾌하게 이해 되었습니다.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학년 말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가혹 했지만 시험을 치르고 나서는
얼마나 믿음이라는 실력이 향상 되었든가 !
신부님, 흰눈이 소리없이 쌓여 포근한 오늘, 좋은시간 보내셔요^*^
아이나 어른이다 시험은 늘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부정이 없는 한 시험처럼 정직한 것도 없다 싶은 거지요.
공부 한 만큼 성적은 나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예전에 이 복음을 대할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인격으로는 이렇게까지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을까 해서지요.
점차 철이 들고 삶의 경험을 통해 복음을 대하는 마음은
그래, 상대의 깊은 속뜻을 제대로 볼 줄 모르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다가 그 깊은 뜻에 걸러 넘어져
한 번 뿐인 인생을 망치는 일은 없어야겠다, 라고 바뀌어 가더군요.
구원의 문제는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돼지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아침입니다.
“아가리”라는 표현을 읽으면서
(얼마나 유쾌했는지 모릅니다.
학생이 스승의 처지로 올라갈 능력이 없으니
스승이 스승의 면모를 벗어던지면서까지 학생의 처지로
내려오시는 그 깊은 배려 아닌가요? ㅎㅎㅎㅎ....)
어미의 자식을 향한 애끊는 마음처럼 예수님께서
얼마나 속이 타셨으면 바리사인들에게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셨던 그 심정의 표현이 아니겠나 싶지요.
사랑이 짙을수록 돌려서 말하지 않고 미화시킬 필요도 없고
직설적이고 원색적으로 말하게 되는 우리네 정서 말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