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토 딕스의 전쟁 제단화(1929- 1932)
작가 : 오토 딕스 Otto dix(1898-1970)
크기; 템페라 4M X 2.5M
소재지 :독일 드레스덴 (Dresden) 주립 미술관
국내에서 생활하다보니 남북 긴장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지만 해외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북쪽의 전쟁광적인 생태와 이웃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헌대 며칠 전 김여정이 북쪽으로 전단을 보내는 탈북자들을 막지 못하는 남쪽 지도자의 책임을 물으며서 여기에 보복을 하겠다는 무서운 악담 후 개성공단에 있는 남북 연락소를 폭파하면서 이것을 동영상으로 온 세상에 보낸 후는 국내에서도 섬찟한 생각이 들어 어디 하나도 좋은 징조가 없는 현실에 불안과 긴장을 느끼게 만들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악담을 시작하면서 서로간에 긴장을 더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서 아무리 대범하고 낙천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과연 전쟁이라는 것이 무d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많은 종교는 어떤 이유로든지 평화를 가르치며 전쟁을 피하는 것이 도리임을 가르치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가 전쟁의 큰 원인이 되었던 예를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이슬람교는 오해와 편견도 있지만 아예 전쟁을 합법화하며 부추기는 종교의 인상을 주기도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세상의 전쟁 중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것이 종교전쟁이라고도 한다.
현대 이슬람 교도들이 많이 사용하는 종교적 동기로 일으키는 전쟁을 지하드, 즉 성전(聖戰)이 세계 평화를 해치는 골치꺼리가 되고 있는데, 전쟁은 이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방어적 수단으로 허용된다. 그리고 이슬람 역사에서 비이슬람교도와의 전쟁은 비록 정치적인 의미가 강하다 하더라도 종교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지하드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합법화 하는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있었다. 사실 성전의 실행은 모슬램 교도들 보나 크리스챤들이 훨씬 더 심했고 잔인했다. 중세가 십자군 전쟁은 참으로 부끄러운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린 것이다. 종교 개혁 후 개신교가 생기면서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와의 종교 전쟁은 17세기 유럽 사회를 퇴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전쟁에 대한 성서의 내용을 인용할 필요가 없이 전쟁을 묵인하거나 교사하는 종교는 그 자체로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며 반인륜적인 행위이다.
작가는 독일 라이프치히 교외의 게라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장식 화가로서의 교육을 받다가 뒤셀도르프 미술 학교에서 수학했다. 그의 작품에는 그가 전쟁에 참전하면서 경험했던 인간의 비참함과 허무, 추악함을 여과없이 과감히 표현함으로서 당시 일기 시작한 표현주의 야수파들의 성격을 정착시켰다.
작가는 18세의 나이로 일차 세계대전 때 가장 치열한 지역이었던 스위스로 이어지는 서부 전선에 투입되어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던 충격적이며 비참한 전쟁의 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그런데 이 방법을 작가는 좀 특이한 것에서 찾았다. 르네상스 시기에 독일에서 성당 제단화라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것은 제단 중앙에 3폭의 성화를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신앙의 내용에 심취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교리교육의 도구였다. 당시 대부분의 신자들이 문맹인 처지인데다. 성서 조차 필사본인 처지였으니 소수의 사람이 아니면 성서를 대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이 제단화는 신자들의 삶에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 착안점과 기법을 발전시켜 마치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서 활약한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巨匠)들과 같이 윤리적 발언을 배경으로 하는 독특한 화풍(畵風)을 세워 나갔고, 자신의 참전 경험을 바로 화폭에 담았다. 한마디로 자신이 직접 전쟁에 참가하면서 겪은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더 생동감 있는 감동을 주게 되었다.
그런데 전통적인 제단화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중심에 두고 사도들이나 성인들을 등장시켜 신앙의 내용을 묵상하게 만드는 것과는 달리 자기 삶으로 겪은 전쟁의 비참함을 제시하면서 성서가 제시하는 평화에의 희원, 인간의 탐욕으로 생긴 전쟁은 어떤 경우이던 피해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했다.
작가는 중세기 독일에서 이젠하임 제단화라는 너무도 유명한 작품을 남긴 그뤼네발트가 그린 제단화의 형식에 자기가 겪은 전쟁 체험을 그림으로서 인간 사회의 너무도 비참한 현실인 전쟁에 대한 대단한 경각심을 주었다.
(이젠하임 제단화)
한 병사가 방독면을 쓰고 참호로부터 나와 폭격으로 박살이난 전쟁터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다. 폭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에 들어 있다가 폭격이 멎자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피고 있다. 그의 시야에는 참으로 과거 어느 전쟁터에서도 볼 수 없는 참상이 전개되고 있다. 독가스로 전쟁을 하면서 수 많은 사람을 한번에 살상한 것은 전쟁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그러기에 어떤 전쟁 보다 일차 대전은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과거처럼 보병들의 싸움의 결과는 일부분의 손상으로 끝났으나 화생방 전투는 모든 것이 박살나게 만들어 파괴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전체가 파괴로 보이는 참사의 현장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죽음과 파괴의 흔적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윗부분 철조망이다.
전쟁에서는 언제나 전사자가 있기 마련이나 그전까지의 전쟁에서는 죽은 시체가 널부러진 것이었으나 화생방 전쟁 핵전쟁에서는 시체가 아예 박살나서 분해된 것이 특징이며 여기엔 이런 죽음의 비참한 모습이 제시되고 있다. 강력한 가스 폭발에 의해 휘어진 철조망에 역시 폭발로 사지가 분해된 시체 하나가 걸려 있다. 시체가 고스란히 걸린 것이 아니라 한 부분이 걸려 너덜너덜한 걸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생명이 끊어진 죽음이 아니라 삶이 완전히 박살나서 분해된 모습이다. 이 시체는 한 인간으로서 너무 소중한 존재이며 특히 그의 부모와 가족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존재인데 철조망에 걸려 거래처럼 나부끼고 있는 것은 인간의 사악함으로 시작된 전쟁의 잔인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전쟁이란 비참한 것 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파괴요 손실 요인임을 알리고 있다.
전쟁은 이긴 편도 진 편도 없는 오직 죽음과 파괴만으로 끝나는 한편의 거대한 비극이다
작가가 종군했던 1918년도에만 이 지역 전투에서 70만에서 100만명의 사상자를 낸 말문이 막히는 전투였다.
작가는 여기에서 자기의 뜻과 무관하게 전쟁에 참여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은 전우들을 이젠하임 제단에서 십자가에 목박혀 계신 예수님에 비겼다
이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은 무의미하고 슬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처럼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기에 작가는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목박히신 예수님처럼 인간의 사악함과 탐욕이 만든 지옥과 같은 모습을 제시하면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작가는 전쟁에 참전하던 자기의 모습을 왼편에 그렸다. 그런데 이 때 작가는 어리기도 했지만 자기의 참전이 세상의 악을 이기고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란 생각에서 참전했다. 한마디로 평화를 얻기 위해선 전쟁을 필수적이라는 전쟁에 대한 긍정적 사고의 표현이었다.
작가는 자기의 전쟁 중 입대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는 입대전에도 전쟁터의 비참함과 어려움을 듣고 알기에 불안이 없던 것이 아니었지만 자기의 노력에 의해 자기 편이 이길 수 있고 또 이것을 통해 세상의 평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어느 정도 사명감을 가지고 출정하고 있다. 전쟁 터를 향하는 군인들이 행군 중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평화를 키우는 일꾼으로 출정한다는 대단한 자부심에 빠져 있다. 악을 무찌르고 조국을 침략하는 악한 세력들을 꺽고 이 세상을 더 밝게 만들겠다는 희망으로 총을 들고 군장을 꾸린 무겁고 불편함을 이기며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전쟁의 실상을 모르고 낭만적 승산에 도취된 인간들의 무지 상를 설멍하며 작가는 이것의 허구성을 고발하고 있다. 즉 전쟁을 통해 선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확신에 빠진 인간들의 환상을 표현하고 있다.
중앙의 참사를 겪고 살아 남은 부상병들이 지옥같은 전장터를 떠나 피난하는 모습이다.
부상병을 부축하고 있는 병사가 바로 작가의 모습이다. 그는 전쟁의 비참함에서 해방되기 위해 부상병을 도우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여기며 부상병을 부축해서 나아간다.
작가는 전쟁을 체험하면서 왼편의 참전 상태에서 느낀 전쟁에 대한 환상과 허구성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눈으로 전쟁을 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 전쟁을 평화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할 필요악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아니고 전쟁은 그 자체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악이요 파괴임을 알리고 있다. 어떤 이유나 핑계로도 전쟁의 당위성은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인류 역사상 끊임없이 있었던 전쟁 중 가장 비참하고 대량 살상이 자행되었던 전쟁터에서의 기억을 통해 전쟁은 어떤 경우이던 피해야 한다는 강한 교훈을 선사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표현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제단화의 아랫 부분을 Predella라고 해서 3면의 제단화에서 표현을 못한 남은 부분을 그렸는데, 여기에서 작가는 참전한 군인들을 전쟁의 포화속에서 잠시 휴식하고 있는 모습을 남겼다.
포화가 잠시 멈춘 사이 군인들이 방공호와 같은 공간에서 휴식하고 있다. 이곳은 폭격을 피할 수 있고 살상 게스의 독성에서 벗어난 곳이기에 잠시나마 휴식을 청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인간 삶에 있어서 휴식처럼 의미있고 즐거운 것이 없다. 인간은 휴식을 통해 새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고 , 인간 삶을 위축시키고 침체하게 만드는 여러 피로를 벗어날 수 있는 인간 삶의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지금 방공호에서 하고 있는 휴식은 이런 긍정적인 의미가 조금도 없는 참으로 악마적 소모성의 휴식이다.
이들이 휴식후에 가야 할 곳은 전장이며 이곳에는 어떤 창의적인 것도 보거나 들을 수 없는 생명 보다 죽음, 건설 이나 창조보다는 파괴와 살상의 장소이다.
그러기에 이들의 휴식은 새로운 비참함을 향해 나아가는 불안과 공포의 여정으로 볼 수 있다.
작가가 이 전쟁에 참전 했던 비슷한 시기에, 이 전쟁에 참전했던 역시 독일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Erich Maria Remarque: 1898- 1970)은 이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서부 전선 이상없다”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 미술을 통해 이 전쟁의 비참함을 알린 작가와 또 다른 문학적 표현으로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잔인함과 처참함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문학형식을 통해 남겼다. 그후 이 작품은 그후 영화화 되면서 전쟁을 지상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인정해야 하는 필요악으로 주장하는 군국주의 자들에게 많은 반대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이 작가와 다른 방법으로 전쟁에 대한 각성의 관점을 알렸다.
이 작품에 신앙인이 들어야 할 전쟁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있다. 전쟁의 더 없이 비참한 폭격으로 튀어나는 자기 창자를 들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 군인, 머리가 박살난 상태에서 몸만으로 달려가는 군인을 보면서 어떤 병사가 휴식 시간에 신앙적인 푸념을 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잔인한 것들을 허락하시는지? 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이런 고통에 침묵하시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한 병사의 이런 푸념에 다른 병사가 이런 대답을 한다. 전쟁은 인간들이 만든 것이며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하느님께 책임을 묻기보다 인간적 각성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우리는 세계 여러 국가 중에 전쟁의 위협속에 노출된 최악의 국가중 하나이기에 크리스챤으로서 전쟁에 대한 바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이것은 군종단을 도우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더 비싼 신무기로 무장하는 것도 아니다.
전쟁으로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깊은 이해가 있을 때 전쟁은 피할 수 있고 평화는 가능한 법이다. 이 작가는 바로 자기 작품을 통해 현대 크리스챤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전쟁에 대한 바른 이해를 알리고 있다.
세상에 어떤 동기의 전쟁이라도 전쟁을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전쟁은 어떤 이유로던지 미친 짓이다. 전쟁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는게 아니라 전쟁이 없을 때 평화는 가능하다
작가는 이사야 예언자가 제시하는 더 없이 아름다운 평화에의 희원을 자신의 끔찍한 전쟁을 통해 알림으로서 어떤 평화주의자들 보다 더 강력하게 평화에의 희원을 감동적으로 알렸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야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