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마태오복음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비로운 사람이란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고
그 반대로 용서하고 주는 사람이란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시는데,
우리가 정말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되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고,
노력을 좀 하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린다면,
되려고는 해야겠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곧 주님께서 초대하셨으니 되려는 의지는 가져야겠지만
나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버지 당신의 자비를 주십사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비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가져야 가능한 것인데
애초 우리는 하느님 같은 사랑이 없습니다.
기껏 사랑이라고 가진 것이 자비로울 수 있는 사랑은 아니고
좋아하는 것을 바라고 가지려는 사랑 정도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정도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랑이니까 당연히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사랑은 이런 풋내기 사랑보다 월등할 뿐 아니라
사랑 중에서 가장 압도적이고 가장 월등한 것입니다.
본래 자비롭다는 것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가 아니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줄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랑을 가져야
용서도 하고 필요로 하는 무엇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가 무슨 짓을 해도,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끄당겨도
“허허 그놈 참!”하고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으려면 한없이 낮추어야 합니다.
판단과 단죄는 윗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실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니
만약 누가 남을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자신이 그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고
자기는 죄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음은
자신을 낮게 여기고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 자비로운 사랑은
압도적이면서도 낮추는 사랑인 것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비로운 사람이란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고
그 반대로 용서하고 주는 사람이란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시는데,
우리가 정말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되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고,
노력을 좀 하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린다면,
되려고는 해야겠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곧 주님께서 초대하셨으니 되려는 의지는 가져야겠지만
나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버지 당신의 자비를 주십사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비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가져야 가능한 것인데
애초 우리는 하느님 같은 사랑이 없습니다.
기껏 사랑이라고 가진 것이 자비로울 수 있는 사랑은 아니고
좋아하는 것을 바라고 가지려는 사랑 정도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정도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랑이니까 당연히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사랑은 이런 풋내기 사랑보다 월등할 뿐 아니라
사랑 중에서 가장 압도적이고 가장 월등한 것입니다.
본래 자비롭다는 것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가 아니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줄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랑을 가져야
용서도 하고 필요로 하는 무엇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가 무슨 짓을 해도,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끄당겨도
“허허 그놈 참!”하고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으려면 한없이 낮추어야 합니다.
판단과 단죄는 윗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실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니
만약 누가 남을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자신이 그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고
자기는 죄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음은
자신을 낮게 여기고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 자비로운 사랑은
압도적이면서도 낮추는 사랑인 것입니다.
“줄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랑을 가져야
용서도 하고 필요로 하는 무엇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줄 수 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줄 것이 있어야 하고,
나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 할 수 있는 자아가 있어야겠지요.
나 없이 나를 있게 하신 하느님이시라면
나는 줄 수 있을 만큼 사랑 받았고
거저 받은 생명이니 거저 줄 수 있다는 말은
그렇게 부당한 이야기는 아닌 듯 싶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액션을 취하는 압도적이면서도 낮추는 사랑을 살아가는
한 달이 되겠습니다.
어제 루케치오형제회의 우영성 신부님 특강에서
‘가난’이란 자기가 사라지는 것이고,
실패의 체험을 통해 내가 사라지는 만큼 그분이 살아나신다는
말씀이 1등만을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기도해주시는 대로
나를 낮추며 자비로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외치고 애쓰신 선열들의 희생과 사랑에 엄숙히 고개 숙이고,
강진이 있었던 칠레에 희생 많지 않기를 바라고,
그리고 희생이 있다면 그 희생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압도적이면서도 낮추는 자비로운 사랑을 실천하는 한 달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