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을 가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우리는 보통 얘기합니다.
파당을 짓는 것도 좋지 않다고 우리는 보통 얘기합니다.
그것이 좋지 않음은 왜입니까?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고 깨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편 가름이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고 깬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사랑에 어긋난다는 것은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편 가름이 어찌하여 사랑에 어긋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선 보편적 사랑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 할지라도
어느 한 편을 사랑하며 다른 한 편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사랑이라면 어찌 한 편을 사랑하고 한 편을 배제합니까?
사랑이란 나 중심이 아니고 상대 중심인데,
한 편을 택하고 다른 편을 배제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이 아닙니까?
선택하고 배제하는 기준이 나이고
나의 좋고 싫음이고
나의 이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편 가름은 사랑이 아니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증여적이지 않고 타자 소유적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번 동계 올림픽 때 저는 김 연아를 응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인 김 연아를 응원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신자의 말초적 감성은 가톨릭 신자인 김 연아를 사랑하지만
가톨릭의 본래적 정신은
한 교파로서의 가톨릭 신자인 김 연아를 초월합니다.
가톨릭은 그 뜻이 보편적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대한민국의 딸인 김 연아를 응원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의 말초적 감성은 국민의 딸인 김 연아를 사랑하지만
아사다 마오의 눈물이 가여운 보편적 사랑은
대한민국의 딸인 김 연아 사랑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편 가르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악령이 있습니다.
존재는 不偏不黨하게 모두 사랑해야 하지만
선과 악의 문제에서는 분명하게 한 편을 선택하고
참과 거짓의 문제에서는 분명하게 한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과 악의 문제에서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악령을 거부하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 이상입니다.
악이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선에 기대어 있고,
악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으로 있지만
하느님의 선은 악에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존재하듯
하느님은 무엇으로부터 존재하지 않으시고
무엇에 기대어 존재치 않으시며
스스로 그리고 홀로 존재하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홀로 계시지만 사랑이시기에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을 위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도
여러 존재 중에서 한 존재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존재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신 하느님을,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파당을 짓는 것도 좋지 않다고 우리는 보통 얘기합니다.
그것이 좋지 않음은 왜입니까?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고 깨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편 가름이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고 깬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사랑에 어긋난다는 것은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편 가름이 어찌하여 사랑에 어긋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선 보편적 사랑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 할지라도
어느 한 편을 사랑하며 다른 한 편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사랑이라면 어찌 한 편을 사랑하고 한 편을 배제합니까?
사랑이란 나 중심이 아니고 상대 중심인데,
한 편을 택하고 다른 편을 배제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이 아닙니까?
선택하고 배제하는 기준이 나이고
나의 좋고 싫음이고
나의 이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편 가름은 사랑이 아니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증여적이지 않고 타자 소유적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번 동계 올림픽 때 저는 김 연아를 응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인 김 연아를 응원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신자의 말초적 감성은 가톨릭 신자인 김 연아를 사랑하지만
가톨릭의 본래적 정신은
한 교파로서의 가톨릭 신자인 김 연아를 초월합니다.
가톨릭은 그 뜻이 보편적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대한민국의 딸인 김 연아를 응원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의 말초적 감성은 국민의 딸인 김 연아를 사랑하지만
아사다 마오의 눈물이 가여운 보편적 사랑은
대한민국의 딸인 김 연아 사랑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편 가르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악령이 있습니다.
존재는 不偏不黨하게 모두 사랑해야 하지만
선과 악의 문제에서는 분명하게 한 편을 선택하고
참과 거짓의 문제에서는 분명하게 한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과 악의 문제에서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악령을 거부하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 이상입니다.
악이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선에 기대어 있고,
악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으로 있지만
하느님의 선은 악에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존재하듯
하느님은 무엇으로부터 존재하지 않으시고
무엇에 기대어 존재치 않으시며
스스로 그리고 홀로 존재하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홀로 계시지만 사랑이시기에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을 위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도
여러 존재 중에서 한 존재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존재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신 하느님을,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을 던져 헌신하시는 신부님..
오늘은 신부님이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